#1. 문젠 나야


지호 : 마음만 커서 무작정 갔던 건데 기석이형을 보는 순간,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정인 : 그래서 나한테도 안 들키면서 날 몰래 보겠다고...


지호 : 허락해주면. 안 된다고 하면.


정인 : 당연히 안 되지. 그렇겐 못 해.


지호 : (고개 살짝 끄덕거리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정인씨 입장에선.


정인 : 내 입장이 뭔데.


지호 : 누가 자신을 몰래 보고 있다는 걸 알면.


정인 : 그러든 말든. 안 들키겠다며. 그럼 내가 알아채지 못한다는 건데 상관없지. 문젠 나야. 그래. 지호씨는 원할 때 언제든 날 보면 되는데 그럼 난 어떻게 하냐구. 나도 허락받고 몰래 지호씨 훔쳐보러 다닐까요? 왜 지호씨 생각만 해? 당신만 좋으면 돼? 내 속은 어떻든 말든 상관없고? 지호씨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지호 : 정말 이기적으로 해볼까요.


정인 : 아니.


(지호, 차에서 내려 밤바람에 열을 식히는 동안 정인 눈물 닦고)


지난번 리뷰에서 궁금했던 부분인데 문자 그대로 몰래 보겠다는 거였네. 지호의 절절한 마음이야 익히 아는 바였지만 정인의 긴 대사를 봐. 지금 사랑 고백하는 거 맞지? 너만 나 좋아하는 거 아니고 나도 너 좋아해 그런 의미로 읽히는데? 거참... 서로 관음하겠다는 건가. 이 정도 되면 사귀어야 되는 거 아닌가. 이제 오피스텔 장면으로 가보자.


#2. 몰라 내가 죽겠는데


(지호, 정인의 오피스텔앞에 차를 세우고)


지호 : 그만해야겠어요. 오는 내내 생각했어요. 이대로 가다간 정인씨도 한순간때문에 많은 걸 잃게 되고 그보다 훨씬 많은 고통이 따라올 거예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 아니에요. 내 이기심이야. 


정인 : (고개 숙이고 있다가 지호 쳐다보고)


지호 : 더 솔직히 말하면 다신 없을 줄 알았던 감정들에 내가 취했었어요. 앞뒤 없었어. 갈수록 못나고 못된 생각만 커져. 더하면 꼴만 우스워질 것 같애.


정인 : 뭐가 되든 어쨌든 그럼 난 어떡하냐니까.


지호 : 몰라. 내가 죽겠는데.


정인 : 그런 거짓말에 지금 내가 넘어갈 것 같아요?


지호 : 넘어가줘요. 부탁하는 거야. 나 좀 도와줘요.


(두 사람 서로를 길게 응시하고)


이번에 대사를 많이 받아적은 이유가 핑퐁 대사가 빠르게 지나가서 의미 파악을 더 해야될 필요가 있었기때문이야. 지호는 이제 그만하겠다고 선언하고 정인은 나는 어떻게 하냐고 반문하는데 왜 이런 장면들도 달달하게 느껴지는 걸까. 거 참...


아무튼 지호는 이 선언을 이후로 정인에게 더 이상 연락하거나 찾아가지 않지. 그러나 마음속에서도 정인을 완전히 밀어낸 건 아니라서 약국에 술 깨는 약을 사러온 손님을 보고 정인을 떠올리고 친구가 말해준 기석의 결혼에 대한 태도를 듣고 공연히 열을 내기도 해. 동료 약사에게는 내가 너무 아까워 그만 뒀다며 너스레를 떨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지.


지호가 굳게 마음먹고 표면적으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동안 정인의 입장이 오히려 분명해졌던 것 같아. 일단 이번회에서 마음아팠던 부분은 정인의 속앓이였어. 기석네 집안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 그 부분에 대해 기석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육년 연애를 질질 끌고 온 것.


정인은 둘째 딸로 첫째와 막내에게 치여 제 몫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오히려 더 당차고 똑부러지게 살아야만 했을 거야. 그래서 '존중'이 정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 것일테고. 이런 정인에게 기석과 기석네 집안은 독약과도 같지. 주변 여건과 그간의 정때문에 정리하지 못했던 연애, 이참에 확실히 정리했으면 좋겠다.


기석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당연히 더 생각나는 사람은 지호. 이제 정인은 지호에 대한 마음을 누르지 않아. 그가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뒤 정인은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힘들었거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자 정인은 지호에게 택시까지 타고 찾아간다.


#3. 지호네 집앞에서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 벨을 누르는데 지호, 문 열고 나가서)


정인 : 왜 전화 안 받아요? 이제 전화도 안 받기로 했어요?


지호 : 진동으로 해놔서 전화온 줄 몰랐어요. 무슨 일 있어요?


정인 : 나만 있어요? 지호씨는 아무 일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가봐요.


지호 : 미치겠네 진짜.


정인 : 내가 귀찮아요? 짜증나냐고.


지호 : 짜증나. 잘못 찾아왔어. 차라리 오지 말지. 그냥 모르던 사람으로 살지. 이제서 내앞에 나타나서 뭘 어떻게 하자고.


정인 : (손으로 지호 입 막고 눈물 쏟는데)


그간 다정하고 부드럽던 사람이 작정하고 가시돋친 말을 내뱉자 정인은 지호의 입을 아예 막아버린다. 마음을 서걱서걱 베는 칼날을 견딜 수 없었겠지. 둘 다 아픈데 지호는 정인을 위해 일종의 연기까지 하고 있는 셈이야. 정인도 그 속내를 알겠지만 당장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인간관계라는 게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건데 우리 이유는 생각이 많아서 더 힘든 것 같다.


모질게 대해 놓고 정인이 울어버리자 지호는 더 이상 강경한 연기를 할 수 없어 밥 먹었냐고 물어봐. 그리고 정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지.


#4. 칼국수집


(칼국수집에서 정인과 지호 각자 얼큰칼국수와 수제비를 먹는데)


정인 : 맛있다더니 별론가봐. 그럼 그냥 딴 데 가자 그러지.


지호 : 사실은 저녁 먹었어요.


정인 : 되게 속 편한가부다.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지호 : 이정인때문에 식음전폐라도 해야 돼?


정인 : 안 했으면서 뭘. 연락하는 것도 많이 부담스러워요?


지호 : 엄청나지. 잘못 엮였어.


정인 : 미저리같애?


지호 : 더해.


짧게 끊어지는 대화속 진심은 아프고 무겁다. 지호는 저녁을 먹었지만 정인을 위해 다시 식사를 하고 그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정인은 이제서야 칼국수 면발을 후루룩 들이켜. 모르는 사람과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정인은 어느새 뺏어먹겠다며 지호에게 수제비를 시키라고 할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지.

그러나 이 조용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지호는 정인의 애정을 더 이상 받아줄 수 없어 그녀를 미저리보다 더하다고 평해버린다. 아마도 정인의 표정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지호에게는 매순간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테지만 지호는 안간힘을 다해 정인에게 선을 그으려 해. 우린 잘못 엮였다고 그렇게 단정짓지.

#5. 찻집

(찻집에서 차 마시며)

지호 : 누구든 나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싫어해요. 앞으로 울지 말아요.

정인 : 지호씨때문에 운 거 아니에요.

지호 : 승부욕 강한 거 아는데 나에 관해서는 오기 부리지 마. 정인씨만 손해야.

정인 : 그래서, 앞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지호 : 친구해준다니까. 정인씨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가끔 밥 먹고 또 차 마시고 사이사이 안부 묻고. 그 정도만.

정인 : 이젠 내가 자신없는데.

지호 :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정인 : 쌀쌀맞다.

지호 : 얼마나 기를 쓰면서 하는 얘긴지는 안 느껴지나.

정인 : 알 게 뭐야 내가.

지호 : 또 나왔다. 못된 이정인.

정인 : 앞으로 계속 나올 거야. 나 원래 말 안 듣는 거 전문이거든.
 
지호 : 도와줘요 나 좀. 진심이야. 정인씨가 도와줘야 돼.

정인 : 못 하겠다면 어쩔 건데.

지호 : 억지로라도 해요.

정인 : 싫어.

지호 : 해. 정인씨가 너무 아까워.

지호는 기를 쓰면서 정인에게 선을 긋고 정인은 이제 친구할 자신없다고 말해버려. 감정의 진행 속도가 같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진행 속도가 다소 다르더라도 연애를 시작할 여건이 무난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둘은 이렇게 아픈 대화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거야.

자신의 감정을 확 풀어놓고 그걸 따라가면 정인이 힘들어 할 게 눈에 뻔히 보여 자제하고 또 자제하는 유지호,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이제 지호에게 속내를 다 보여주는 이정인. 이 둘을 어쩌면 좋냐.

다행인 건 막판에 정인이 지호앞에서 보란 듯이 기석에게 '헤어져'라고 말했다는 것. 그래서 이 숨막히는 애정게임에 돌파구가 마련되었다는 것. 물론 새로운 시련이 닥치겠지만 말야.


* 칼국수집 사장님 쓰레기 버릴 때 그 안에 기석이 영혼이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 나만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