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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된 사고, 뜻밖의 만남.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이정인은 '소확행'에 대해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송영주에게 이야기한다. 퇴근하고 친구와 함께하는 술 한 잔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는다는 정인의 말은 쉽게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은 어쩐지 서글픈 자기 위안으로 들리기도 한다. 술 한 잔에 행복을 얻으면서 살고 있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고,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3녀 중 둘째인 정인은 자식들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가부장적인 교육자 아버지와 이에 맞서 자식들의 편이 되어주는 어머니를 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정인은 도서관 사서가 됐고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하면서 지루하고 괴로운 순간들도 있지만 대체로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한편, 금융업에 종사하는 남자친구 권기석과 미지근한 만남을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다. 적당한 즐거움과 적당한 권태로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거침 없고 당당했던 예전의 자신을 일정 부분 잃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어른이 되기 위해 으레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정인의 삶은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기쁠 일도, 크게 슬플 일도 없이.


자, 이번에는 유지호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해보겠다. 학업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약사가 됐고, 약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마음씨 좋은 부모님과 어린 아들이 있다. 은우의 생모는 은우를 낳은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홀연히 사라졌고, 지호는 부모님과 은우를 함께 키웠다. 은우가 태어나고 지호의 삶은 그 전처럼 자유롭진 않지만 지호에게 은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한편 그 전까지 아마도 주로 남들에게 부러움을 샀을 지호가 미혼부가 됐다는 사실은 남들에게 측은함과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됐다. 스스로도 그 요소로 인해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아니면 실패로 끝난 사랑 때문일까? 예전에는 패기 넘치고 거침 없었던 그였지만 자신의 행동에 자꾸만 제동을 걸게 된다.


영주와 밤늦게까지 술을 과하게 마시고 늦게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정인은 출근 시간에 늦을 위기라는 것을 깨닫고 부리나케 달려나간다. 일상의 작은 사고. 이어서 택시를 잡으려고 선 대로변에서 숙취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마침 눈 앞에 있었던 지호가 일하는 약국에 들어선다. 시청자들은 정인과 지호의 이 만남이 앞으로 두 사람이 떠날 여정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서로를 마주 본다.


정인은 숙취해소제를 복용하고 나서야 정신없이 나오느라 지갑을 영주의 집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다시 한 번 작은 사고. 돈을 나중에 주겠다는 정인에게 약국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황당한 일을 숱하게 겪었을 지호는 행여 성가신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돈을 나중에 주겠다는 정인에게 그냥 가라고 한다. 정인은 이에 오기가 발동한다. '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상품을 갈취하는 사람이 아닐 뿐더러 약사님이 제 의사를 묻지 않고 약을 미리 개봉했으니 약사님 잘못도 있는 것이다.' 주변 지인들의 말처럼 명확하고, 명석한 그녀답게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는 말로 정인은 자신을 변호한다. 그러면서 연락처까지 주겠다고 하는 정인. 이 당돌하면서도 믿음직스러운 행동은 지호에게 정인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연달아 이어진 작은 사고들의 도움으로 일어나지 않았을 혹은 기억되지 않았을 뜻밖의 만남은 정인과 지호에게 확실하게 각인된다.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지도 모르는 '큰 사고'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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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만 모른다.


김은 작가는 직접적으로 회상 장면을 보여주거나 과거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혹은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갖고 있는 생각들로 끊임없이 정인과 지호에 대해서 구체화한다. 그들의 지인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인식한 정인과 지호에 대한 사실과 의견을 제시한다. 이러한 일종의 라쇼몽 기법은 지호와 정인을 묘사하는 데 있어 양감과 질감을 더한다. 덧붙여 그들 주변 사람들 각각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그들 각각에 대해서 묘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나의 상황을 놓고서 주변 인물들이 상반된 의견을 제시할 때 이 묘사는 극명해진다. 지호가 미혼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기석이 보여주는 반응과 정인의 동생 재인이 보여주는 상반된 반응은 그 단적인 예다.


한편, 김은 작가는 이 기법을 통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단편적인 문장으로 영속적이고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A하기도 하고, B하기도 하며, C하기도 하다. 정인은 드라마 초반에 주변 사람들의 진술에 의해 거침없고 명석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지호를 만나고 대화를 나눈 후 정인은 자꾸 멍해지고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지호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멍해지고 말수가 적어진다. 나른한 봄이 마치 멍해지는 바이러스라도 전파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날, 그 시간 약국에서 마주친 이후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미처 눈치 채기도 전에 시시각각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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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모험.



김은 작가는 정인과 지호가 만나고 호감이 커진 상황에서야 기석이 정인에게 마냥 좋기만 한 연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정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습관처럼 해댄 것, 정인을 자신의 결혼 상대로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털어놓지 않은 것,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설득하지도 않은 채 결혼하자는 말을 줄곧 늘어놓은 것, 이로 인해 정인이 상처받아왔다는 것을 5회와 6회에서 전달했다.


정인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표하기 시작한 정인과 지호. 이러한 정인과 지호의 관계는 시청자들에게 즉각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회가 끝난 지금도 정인과 지인의 관계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부 있긴 하지만 4회까지 방영된 시점에는 그들의 만남을 비판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상당히 존재했다.


김은 작가는 정인과 지호의 사랑에 대해서 가해질 수 있는 비판을 조금이나마 방지하기 위해 기석이 정인에게 불성실한 연인이라는 다소 정상참작될만한 사유를 처음부터 늘어놓을 수 있었음에도 도전적인 배치를 감행했다.이러한 모험적인 스토리텔링은 어떤 사람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그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를 한 번 더 살펴보게 하는 생각해보게 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편, 이제까지 묘사된 기석의 모습은 불성실한 연인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만장일치를 이뤄낼만큼 연인으로서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기석은 정인의 언니 서인의 남편 남시훈처럼 심각하게 폭력적이지도, 능력은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하지도 않다. 여자 관계가 복잡하지도, 정인의 행동 하나 하나에 사사건건 집착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눈에는 정인에게 당하고 있는 순수한 피해자로 보일 만큼 기석은 적당히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편이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그런데도 정인이 자기 중심적이고 고압적인 면이 있는 그와 결혼하는 것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선뜻 혹은 전혀 내키지 않는다. 아직 극이 6회까지밖에 진행되지 않아서 단정할 순 없지만 지호와 정인에게 면죄부로 기능할 수도 있는 심각한 결격사유를 기석에게 주지 않고 다소 평범하게 느껴지는 단점을 부여하는 선으로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모험을 김은 작가가 감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질문 거리들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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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어요.


안판석 감독은 주인공이 이동하는 순간을 카메라에 롱쇼트로 담아내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곤 한다. 재채기를 참을 수 없듯이 참지 못하고 자꾸만 생각나는 이에게 앞뒤 잴 경황도 없이 가는 모습. 그것만큼 온전히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이 있을까?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더 사랑하는 감정이 전해지는 순간들. 5회에서 정인이 2층에 사는 친구 영주의 집을 지나쳐 마침내 지호가 사는 3층 집 앞에 당도하는 과정을 카메라는 그 모습이 올려다 보이는 먼발치에서 세밀하게 잡아낸다. TV에서 보기 드문 이 실험적인 로우-앵글 샷은 정인이 그 날 지호의 집 앞에 섰을 때 이미 지호와 사랑할 준비를 마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시청자들이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이미 깨져버린 사랑이라 해도 표면적으로 연인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죄악시되는 세태에서 정인과 지호는 그 금기를 깼다. 하지만 그들은 그 금기의 존재감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고 그래서 서로에게 더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또 참는다.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상대방을 위해서. 동시에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고, 하려는 일이 누군가에겐 배신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고, 일말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뻔뻔하지 못하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고 난 후 기존의 관습과 체제에 항거하는 모습에 일정 부분 초점을 맞춰왔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 전까지 유지해온 지위를 벗어던지고 물질적인 안락함을 위해 그들이 수용하고 협조했던 관습과 체제에 돌을 던졌다. 사랑을 믿기에, 사랑하는 이를 믿기에 그들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무모하리만큼 용감해졌다. 어떤 측면에선 순수하기 그지없는 그들에게 안쓰러움을 느끼고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정인과 지호도 어느 정도 그들과 닮아있기에 두 사람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이제 막 정인과 지호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정인은 기석에게 이별을 고했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서막. 정인과 지호가 만난 과정을 모르더라도 알더라도 기석은 정인의 곁에서 절대 쉽게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 또한 기석이 물러난다고 해도 정인이 소위 배경이 든든한 번듯한 사윗감을 마다하고, 아이가 있는 지호와 만나는 것을 정인의 아버지는 쉽게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난관을 정인과 지호는 어떻게 헤쳐나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어떻게 변모하게 될까? 정인과 지호는 지배적인 관습과 체제에 어떻게 맞서 싸울까? 지금까지 한 이야기보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가 더 기대되는 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