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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래 -


춘추시대 5패(五覇) 중 하나인 진(晉)나라에 도공(悼公)이 군주였던 시절.


도공은 폭군이었던 여공을 폐하고 옹립된 군주였기에 선정을 펼치려 매우 노력했고 그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명장 한궐을 재상에 임명했고, 조무, 위강 등의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해 내실을 다져가고 있었다.


즉위 후 몇년 지나지 않아 초(楚)나라와 정(鄭)나라가 연합해 진(晉)나라의 동맹국인 송(宋)나라를 침입했다.


송은 진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도공은 주변의 약소국들과 연합해 정나라로 진격을 하였다.


진은 당시 재상이던 순앵과 위강의 계책으로 정나라의 항복을 받아냈고, 


초나라까지 정나라 국경에서 철수케 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항복한 정(鄭)은 도공에게 항복의 표시로 수많은 전차와 악사, 악기, 미녀들을 진상했다.


도공은 모든 것은 위강의 공으로 돌리며, 진상품의 절반을 그에게 하사하려 하자 위강은 아래와 같이 간언한다.


"폐하께서는 국가가 편안할 때에 위급함을 생각하시옵고, 그 위급함을 생각하시어 준비를 갖추셔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아 주시옵소서."


라며 세번이나 하사품을 거절했다. 이에 도공은 


"그대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짐이 8년간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모았는데, 


이 악기소리들의 조화 같이 화합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러니 공도 나와 같이 이 음악을 즐기시게."


라고 설득하자, 위강은 그제서야 하사품을 받았다.



편안할 때도 위태로울 때의 일을 생각하라는 뜻의 '거안사위(居安思危)'는 이와같은 위강의 충심어린 간언에서 유래되었다.


좌씨전(左氏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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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래 -


중국 후한(後漢)말에,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양홍은 나름대로 뜻이 있어 결혼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고을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은 못생긴, 서른이 넘은 맹광(孟光)이라는 노처녀가


'양홍 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 


라는 말을 떠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를 들은 양홍은 뜻밖에도 이 맹광이란 처자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그러나 혼인 후 며칠이 지나도 양홍이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맹광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


라고 했다. 그러자 맹광은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맹광은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양홍과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梁鴻)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왕실을 비방하는 시가 발각되어 오(吳)나라 땅으로 건너가 


고백통이라는 사람의 방앗간지기가 되어 지냈다. 


비록 양홍의 신세가 이렇게 몰락을 했어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맹광은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양홍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은 양홍 내외를 예사 인물들로 보지 않고 이 부부를 성심껏 도왔고 양홍은 그 덕택에 수십 편의 명저를 저술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