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의 개혁
옹정제에게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는 정치였다. 당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과거� 입신출세� 축재� 특권계급 형성으로 이어지는,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보스정치였다. 따라서 여론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특권지식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중국정치의 맹점은 벼슬을 얻으려면 과거시험을 준비할 만큼 집안이 부유해야 하며, 또 재산을 모으려면 벼슬을 얻어야만 가능하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관권과 결탁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사업가는 정치보스에게 상납하는 헌금을 충당하기 위해 탈세를 하고 하층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지면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노동의 재생산이 불가능해진다.
청조 초기의 황제들은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이 짧아 과거시험과 관련된 일을 한인(漢人) 대신들에게 맡겨두는 형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과거합격자는 시험감독관의 자유재량에 따라 결정되었고, 감독관과 합격자 사이에는 사제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보스와 부하의 인연이 맺어졌다. 이리하여 옹정시기에 이르자 정치보스를 중심으로 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다. 옹정제는 바로 이 점을 꿰뚫고 있었다. 옹정제는 송대(宋代) 이후 깊게 뿌리박힌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단결하는 붕당을 깨뜨리고, 보스정치와 부정부패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영향력이 큰 정치 보스들을 제거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했다. 그리고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폈다. 아울러 지방관들에게도 주접을 쓰게 하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점검했다.
이처럼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한 사람이 책임지고 처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옹정제는 이 불가능한 정치를 실현했다. 실제로 옹정제가 어떻게 국사를 처리했는지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일했다.(본문 125∼127쪽 참조) 강희제는 종종 사냥도 나가고 또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기도 했지만, 옹정제는 재위 13년 동안 단 한번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천명이 부여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몸이 으스러지도록 국사에 전념했다. 그래서 신하들의 불필요한 알현 신청은 언제나 거절하고, 용건이 있으면 편지를 하라고 했다. 또 자신을 위해서는 궁전의 방 한 칸도 늘리지 않았다. 지방관이 하례장을 올리면서 비단을 사용하면 왜 이런 낭비를 하느냐고 하면서 종이를 쓰게 했다. 그야말로 옹정제는 성실과 근면의 화신이었다.
옹정제는 기본적으로 관료란 사무를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관료가 한가하게 문인취미에 젖어 있거나 축재에 관심을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사회의 특권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황제제도에서 특권이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며, 황제 이외의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 옹정제의 신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옹정제는 천민을 해방시켰고, 지방관들에게는 전례없는 근무지수당을 지급했다.(이것을 청렴함을 기르는 돈이라 하여 ‘양렴은’[養廉銀]이라고 한다.) 그러나 옹정제식의 정치는 옹정제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무쇠라도 견디지 못할 엄청난 양의 국사를 처리하던 옹정제가 죽자 청조의 정치는 다시 강희제식의 관대한 정치로 돌아갔다. 옹정제가 살아 있는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기득권세력들의 불만이 다시 표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옹정제의 한계
옹정제는 중국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했던 중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에 과감히 개혁의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13년 동안 많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그의 사후 다시 과거의 정치로 돌아가긴 했지만 옹정제의 개혁 덕분에 청조는 적어도 1세기 동안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그러면 왜 옹정제식의 정치는 계속될 수 없었을까? 옹정제가 아무리 선의의 정치를 했다 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독재군주에 의한 철저한 독재정치였기 때문이다. 옹정제식의 독재정치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독재정치도 잘만 하면 좋은 정치가 될 수 있다는 따위의 역설이 아니라, 선의의 독재가 낳은 역효과이다. 다시 말해서 선의의 독재를 경험한 대중은 독재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역사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 왜냐하면 독재를 신뢰하게 된 대중은 독재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옹정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
본문중에서(본문 120∼130쪽)
“짐은 하루 종일 문서를 보고 대신들을 지휘하느라 몹시 분주하지만 너희들의 상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다. 만일 보다가 안 보다가 할 요량이었으면 애당초 너희들한테 보고를 하라고 할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 쪽에서도 짐의 다망함을 살펴 긴요한 것만을 골라 간단 명료하게 적어 보내라. 부하를 시켜 탁상 궁리의 작문을 짓거나 몇 냥, 몇 전의 세세한 용돈 출납장 같은 회계보고를 올리는 것은 짐을 방해하고 폐를 끼치는 일일 뿐이다.”
“짐에 대하여 성인이니 뭐니 하는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는 게 제일 싫다. 이런 쓸데없는 편지는 보는 시간이 아깝다.”
실제로 옹정제는 여유가 없었다. 강희제는 정치에 싫증이 나면 강남의 풍경을 예찬하며 여러 번 운하를 건너 쑤저우(蘇州)나 항저우(杭州)까지 유람에 나섰다. 건륭제도 이를 따라 하였지만 옹정제는 단지 베이징 근교에 있는 시산(西山)의 별장에 가끔씩 가는 정도였을 뿐 그 이상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여하튼 일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를 쉬면 하루 분의 일이 밀려 다음에 더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천자 자신이 이런 식이었으므로 지방관들에게도 무익한 여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베이징에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싶다는 청원은 언제든지 거절당하게 마련이었다. 전근하는 관리들은 일부러 길을 우회하여 베이징에 들르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새 임지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짐을 만나러 와서 특별히 이렇다 할 가르침을 받을 일은 없다. 용건은 모두 편지를 통해서 전달하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헛되이 먼 여정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 될 뿐이다. 게다가 지방을 비운 사이에 정무가 지체될 게 뻔하다.”
이렇게 옹정제의 치세 13년 동안, 성실과 근면 그 자체와 같은 황제의 선도 아래 여러 가지 정무와 행정이 착착 성과를 올렸다. 이런 천자의 부림을 받게 되어 견딜 수 없다는 관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천자 밑에서야말로 일할 보람을 느낀다는 관리도 생겨나게 된다.
“천하의 재물은 만민을 위한 것이다. 천자 한 사람의 욕망을 위하여 쓰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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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독재정치도 잘만 하면 좋은 정치가 될 수 있다는 따위의 역설이 아니라, 선의의 독재가 낳은 역효과이다. 다시 말해서 선의의 독재를 경험한 대중은 독재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역사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 왜냐하면 독재를 신뢰하게 된 대중은 독재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지기 때문이다.
이제 현행 헌법상 대한민국에는 의회 해산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개헌 과정에서 국회가 자진 해산하거나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국회가 임기 도중에 해산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독재자 대통령이 제멋대로 의회를 해산했던 상황보다는 나아졌다. 하지만 의회 해산권이 아무에게도 없다 보니 때때로 의회가 파행으로 치닫거나,
행정부/사법부와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심해졌다.[24] 일을 안 하고 놀아도 합법적으로 견제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점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