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주더는 당시의 많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편중독에다가 많은 첩을 거느린 구시대적 인물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참혹한 농민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껴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후 아편도 끊고 모든 지위와 재산을 버린 채 공부를 하기 위해 1922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독일의 괴팅겐에서 유학하며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으며 황포군관학교 교육장 덩옌다 등과도 교류했으나 1925년 중국인 유학생들의 소요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독일에서 추방된 후 소련에 가서 군사학을 잠시 공부하다가 1926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주더의 귀국 전인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주더는 국민혁명군의 지휘관이 되어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하였다.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이다. 유년기의 삶이 상당히 기구한데,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나 학대가 심하여 어려서부터 광부나 노비 등 막일을 전전했다고 한다.[1][2] 16세에 탕성즈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그 후 후난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혁명군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결렬 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 핑장에서 봉기했다가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의 정강산 해방구에 합류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1] 후에 펑더화이가 장교가 된 뒤 할머니를 다시 찾았는데 그땐 집안의 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2] 그의 할머니는 아편 중독자였고 그 냄새가 싫었던 팽덕회는 자다가 일어나 아편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할머니는 크게 노하여 친족회의를 소집하여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고 했다. 계모는 좋다며 찬성했고 아버지도 친족회의의 뜻이라면 그리하자고 했다. 당시 중국은 아직 배타적인 농촌 분위기가 있어서 법보다는 친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 쫓겨나면 갈 데도 없으니... 다만 외삼촌이 반대한 덕분에 살아났다고 한다.
[2] 그의 할머니는 아편 중독자였고 그 냄새가 싫었던 팽덕회는 자다가 일어나 아편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할머니는 크게 노하여 친족회의를 소집하여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고 했다. 계모는 좋다며 찬성했고 아버지도 친족회의의 뜻이라면 그리하자고 했다. 당시 중국은 아직 배타적인 농촌 분위기가 있어서 법보다는 친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 쫓겨나면 갈 데도 없으니... 다만 외삼촌이 반대한 덕분에 살아났다고 한다.
마오쩌둥의 전술적 안목이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 휘하에 머문 저우언라이와는 달리, 장궈타오는 항상 "청강생(마오쩌둥은 베이징 대학에서 직원 겸 청강생 신분으로 공부했고, 장궈타오는 정식 입학생이었다.) 주제에..."라며 마오쩌둥을 무시했고, 마오쩌둥과 빈번히 의견 충돌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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