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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4일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종합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보고서는 중정과 안기부가 정치·사법·언론·노동·학원·간첩 분야에서 통제 및 사찰한 행적에 대한 조사결과를 담았다. <매일노동뉴스>에서는 250여쪽에 달하는 노동분야 보고서를 요약·정리했다.
◇국가 정보기관, 노동통제에 전 방위적 개입= 구체적으로 정부 정보기관은 △노동통제 정보의 생산과 유포 △통제전략의 수립과 조정·지시 △제반 통제장치의 개발과 실행(법·제도·이데올로기) △노조 간부 및 노동운동가에 대한 감시·사찰·수사와 노동조합과 주요 쟁의행의에 대한 지배 개입과 공작·수사 △노동운동 단체에 대한 사찰 감시와 사법처리 △물리적 억압의 실행(직접적 인식 구속 및 공권력 투입과 집회 봉쇄) 등을 실행했던 것으로 진실위는 파악했다.
61년과 63년 이뤄진 노동 관련법 개정과 한국노총 조직체계 구축을 시작으로 정부 정보기관의 노동개입이 시작됐다. 이후 70년대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한 이후 민주노조가 다수 생겨나면서 중정은 노동운동을 반정부운동과 분리하는 데 통제 목표를 두었다. 때문에 민주노조에 대한 내사나 수사는 흔히 도시산업선교회나 학생운동 단체 등 외부 세력과의 연계를 밝혀내는 것에 집중됐다.
동일방식과 반도상사 사례는 민주노조에 대한 감시·사찰·각종 대책들이 조밀하고 강력하게 진행된 사례를 보여준다. 중정에서 이름을 바꾼 안기부는 80년대 전반기 강화된 통제 체제 하에서 민주노조 활동이나 쟁의를 완벽히 통제했다. 하지만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노동자들의 쟁의는 보다 조직적이고 폭발적으로 변해갔다. 이 당시 안기부는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이나 급진적 노동운동단체 통제에 주력했다.
중정·안기부의 노동억압은 일정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민주노조라는 독특한 성격의 독립노조운동이 발생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고 진실위를 평가했다. 국가적이고 체계적인 탄압과 억압이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진실위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그 동안 의혹만으로 제기됐던 일들은 중정과 안기부 등 정부 정보기관의 문서를 통해 확인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국정원은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철저한 자기반성과 함께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한국노총 설립·운영, 중정이 주도?= “1961년 대한노총을 해산하고 한국노총을 직접 조직한 것은 다름 아닌 중정이었다. 한국노총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노동조합이 아니었다. 결성 이후에도 한국노총은 중정의 영향력 하에서 움직였던 조직이다. 한국노총의 이러한 성격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됐다.”
진실위는 정보기관이 노동계에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노총’을 꼽았다. 진실위는 한국노총에 대한 보고서를 앞과 같은 문구로 시작했다. 진실위는 한국노총 결성·운영과정에 중정이 깊숙이 개입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정은 대한노총을 해산한 이후 1961년 철저한 준비를 통해 군사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9명으로 위원회(9인위원회)를 구성, 한국노총을 탄생시켰다. 특히 비판적 성향을 가진 김말룡씨는 한국노총 출범식 날인 8월30일 전격 연행·구속하는 등 반발세력에 대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중정은 자신의 통제할 수 있는 구성원들로 한국노총 간부들을 육성·관리했다. 노총선거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개입했던 것이다.
실제 전 한국전력노조 위원장 배00씨는 진실위와의 면담에서 “김말룡 후보가 (한국노총) 선거에 출마하자 중정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지지의사를 밝힌 전국규모 노조 중 4개에 대해 지지철회 작업을 전개하는 등 물리적 탄압을 행사했다”고 증언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은 물론 각 산별위원장, 대기업노조 위원장도 중정의 낙점을 받지 않으면 당선이 불가능했다.
아울러 중정은 직접 노총 간부들을 협박·회유·구속시키면서 노동단체를 재편하고 노동운동을 엄격히 관리하고 통제해 나갔다. 한국노총과 각 조직에 담당관을 배치하여 일상적인 동향파악을 했으며 중요 노동사건에 대해서도 직접 개입했다.
이에 따라 진실위는 “중정의 한국노총 통제와 개입은 당시 군사정부의 명백한 권력 남용과 오용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선교단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와해공작= 중정은 1970년대부터 노조 민주화를 지원하고 적극적인 현장조직화를 추진해 왔던 도시산업선교회(이하 선교회)를 유신체제의 주요 위해요인으로 규정하고 조직와해를 통해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유신정권 하에서 선교활동은 공장 내에서 벌어지는 비인격적인 대우, 열악한 근로조건, 부당해고와 임금체불 등 시정과 개선 노력에 집중됐다. 대표적으로 원풍모방·청계피복·동일방직 등이 선교회를 통해 조직됐다. 이들의 주요 요구는 ‘체불임금·퇴직금을 돌려달라’, ‘기숙사의 난방과 수도를 고쳐달라’,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보장하라’는 등의 ‘경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중정은 선교회를 ‘용공불순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중정은1974년 ‘한국 도시산업선교연합회 내사계획’을 수립 △개인비리에서 사상검증까지 실무자 전체에 대한 체계적 내사 △관련 노동자 블랙리스트 작성 △조직와해나 활동위축을 위한 각종 공작 등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실제 국정원 보고 문서에는 당시 활동했던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조00 목사 등 7명의 목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재산·전과관계·사상관계·구체적 활동사항과 발언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선교회는 이에 대해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 억압적인 노동통제 정책을 비판하는 양상으로 대응했지만, 70년대 말에 이르면 활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진실위를 밝혔다. 중정의 종합적인 탄압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진실위는 “중정의 도시산업선교회 대책은 조직와해와 제거에 맞춰졌고 이를 위해 물리적 억압뿐만 아니라 이념적 공격을 통한 여론조작과 선교회의 고립화 등 다양하게 이뤄졌다”고 밝혔다.
◇민주노조 탄압과 와해=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 사례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동일방직과 반도상사, YH노조사건, 청계피복, 원풍모방 사건 등을 꼽았다. 중정은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에 대해 끊임없는 관여를 시도했고, 노동쟁의가 전 사회의 주목을 받는 사회문제로 비화됐을 때는 소강상태를 보였다가 다시 틈을 노리는 ‘일보후퇴 이보전진 전략’을 구사했다.
동일방직에 72년과 75년에 민주노조가 들어서면서 중정은 동일방직 노조에 대해 적극 대처하기 시작했다. 이는 노조지부장이 경찰에 연행되고, 분노한 여성조합원들이 지부장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알몸 시위를 벌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전 반도상사 지부장 한00씨는 “동일방직 사태 전후로 기관쪽과 회사쪽 사람들이 현장문제를 하나의 방향을 잡아가며 대처하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확인할 수 있었다”며 “(섬유)연맹 조직국장과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만나면서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반도상사는 중정이 민주노조운동 탄압을 통해 조직와해에 성공한 사례다. 중정은 민주노조가 들어선 초기부터 개입을 시작했다. 국정원 내부문서 ‘반도상사 노조결성 배후조정 일정표’에 따르면 경찰은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최00씨, 총무 조00씨와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언제, 어디서, 몇 명이 접촉을 했는지, 비용이 얼마나 지급됐는지 여부까지 자세하게 도표로 작성해 놓고 있었다. 이미 중정은 노조의 배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 활동도 감시하고 있었다. 중정은 이후 꾸준하게 배후세력과 노동자 사이를 갈라놓는 한편 노조위원장과 조합원에 대한 순화사업을 통해, 반도상사 노조를 직접 관리하는데 성공했다.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중점 개입은 전태일 사건 때부터 시작됐다. 전태일 모친인 이소선씨의 증언에 따르면 중정은 노동청 간부를 통해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며 매수·회유하려 했다. 청계노조가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민주노조의 상징으로 부각되자 중정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배후에서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1980년 5월, 노동계 정화조치와 노동조합 해산 과정에서 중정의 첫 와해공작 대상은 청계피복노조이기도 했다.
원풍모방노조에 대한 중정의 개입은 전 원풍모방 지부장 방00씨의 증언과 국정원 보유문건인 ‘JOC 간부급 불순혐의첩보에 대한 조사보고’(1974.10.04)에서 확인되고 있다. 중정은 당시 노조지부장과 부지부장에게 5급 공무원 자리를 제시하며 노조활동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는 와해공작을 펼쳤다. 1980년 이후에도 중정(당시 안기부)은 ‘원풍모방 노조간부 도피자금 출처 확인보고’(1982.11.26) 등을 남기는 등 감시활동을 지속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제도적 장치를 통한 개입= 80년대 이후 안기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인 노동대책회의와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 노동통제에 개입했다.
노동대책회의(관계기관대책회의)는 80년 4월 사북사태 등 집단적 노사분규가 빈발하자 당시 노동청에서 각급기관이 참석하는 관계기관협의회 발족을 제한하여 81년 2월 총리훈령으로 설치됐다. 노동대책회의는 중앙차원의 노동대책회의와 지역노동대책회의, 실무대책회의로 구성돼 있다. 노동대책회의는 이후 구체적 노동사안 발생 시 공안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지휘·통제를 받는 통합적인 노동문제 대책기구로 활동했다.
중앙노동대책위는 공식적으로 노동부 장관이 소집했지만, 지역노동대책회의는 실질적으로 안기부(중정)가 소집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진실위는 파악했다. 대책회의는 △노사분규의 예방 및 해결대책 마련 △관련기관 간의 정보교환 △노사문제 확산 방지대책 마련 △제3자 개입금지 등 사회에 물의를 야기할 수 있는 노동문제 해결대책 등을 협의·결정하는 기능을 했다.
안기부는 중앙·지역노동대책회의를 통해 노사분규 현안에 대한 정부대책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유관기관의 업무와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진실위는 파악했다. 구체적으로 안기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사측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공권력 투입시기와 방법·절차·주요쟁의 행위자에 대한 사법처리 수준 등을 결정했다.
안기부는 보고자료 ‘노동부, 노동대책회의규정 폐지에 따른 지침시달’에 따르면 노동대책회의는 88년 10월에 공식 폐지됐다. 하지만 89년 울산 현대중공업 테러사건 대책을 위한 ‘지역유관기관 대책회의 결과보고서’가 작성되는 등 관계 법령이 폐지된 이후에도 노동대책회의는 실질적으로 운영됐던 것으로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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