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편집]
묵자의 특이한 점은 중국의 여러 사상가 중 가장 기술자적인 면이 강했으며, 여러 학자들은 그가 목수를 본업 삼아 공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췄을 것이라 보고 있다.[14] 이와 관련되어 대표적인 일화로 삼년에 걸쳐 나무로 새를 만들었더니 날기는 했지만 하루만에 부서졌다는 것이 있으며, 카메라의 원리(카메라 옵스큐라)를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고, 묵자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위에 나온 초의 송 공격을 포기시키려는 유세 도중 초의 기술자 공수반과 서로 나무 모형 병기를 만들어 모의 공성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발명가적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그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묵자는 노동의 중요성과 분업을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이다. 짐승들이야 털가죽 있고 풀 뜯어 먹으면 되므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은 노동이 없으면 빈곤해지고 나라는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의 사상 중에는 아랫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바느질하고 농사 짓고 있으니 지도층도 열심히 정무를 봐서 그들에게 할당된 노동을 하라는 내용이 있다. 비공, 비악, 절장 등등 묵자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주제마다 기반으로 깔리는 게 바로 이 논리이다.
6. 기타[편집]
  • 묵가 교단은 종교적인 비밀결사[15]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신자들의 사유재산은 교단 공동체와 공유되었고, 개인적인 명리를 탐함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교리를 어기는 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주저없이 죽여버리는 모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중 일부는 그를 최초의 마르크스라고도 부른다.
진나라의 복돈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돈은 나이도 많은 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그 아들 하나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거사〉
  • 이런 엄격함은 묵가의 사상이 고평가되는 요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널리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는 하층민 및 기술자 계층의 지지를 널리 받은 모양이다. 맹자도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양묵지도'(楊墨之道. 양주와 묵적의 도)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특히 맹자는 양자 항목에서도 언급하듯이 인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기초로 다른 대상에 대해 차등적으로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과 반대로 가족 등 집단의 해체까지 주장한 묵자에 대해선 '무부(無父)', 즉 아버지도 없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묵가는 '남의 부모자식도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해라'라고 주장했는데, 맹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부모랑 자기 부모랑 같냐'는 식으로 나온 것.[16]
  • 그러나 맹자나 양자도 자신들의 사상에 배치되는 묵자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는 진실로 천하를 사랑하였다"며 그를 인정했다. 그런데 의외로 맹자와 묵자가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는데, 위정자들이 나라 통치를 개판으로 하면 하늘의 뜻을 받아 그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한 부분이다.[17] 다만 이 부분이 정작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계층의 입장에선 굉장히 껄끄러운 내용인지라 상당히 박해를 받았는데, 묵가는 이 외에도 사상이 전반적으로 지배계층 입장에서 반국가적인 내용이 많은지라 이미 진나라 대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아서 한나라 대에 이르면 아예 묵가 학파 자체가 절멸될 정도였고, 맹자는 후대 왕조들이 이 부분만 쏙 빼놓고 말했다. 아예 주희는 성리학을 집대성하면서 이 부분을 없애버리고 형이상학적인 내용까지 더해서 유가를 크게 바꾸까지 한다.
  • 묵공의 혁리는 묵자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묵자가 주창한 '겸애'를 실천하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양성을 지키러 오는 것이다. 많이 왜곡되고 과장되었지만 묵공에서는 묵자 사후 묵가가 어떻게 분열되고 사라져 갔는지를 보여준다.
  •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노동의 가치에 관한 얘기라던지, 잉여생산물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등 공산주의와 통하는 부분도 있고, 심지어 공동체의 초소화, 반강권주의, 반전주의 등 아나키즘과도 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 또한 청조 말기와 민국 시기에 열강들의 침략으로 개판 5분전이 된 중국에서 제자백가 사상가들 중 상당히 재조명된 학파이며, 양계초 등의 지식인들이 주석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배척받았다. 이는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대에는 다시 '제자백가들 중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서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높이 평가하는 추세이다.[18]
  • 사상의 주가 되는 겸애 때문에 천주교(=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역시 묵자의 일파로 인식되지기도 했다. 얼핏 보면 묵가의 겸애와 그리스도교의 박애는 비슷해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교의 아가페는 더 정신적이고 희생적, 무조건적인[19] 부분을 강조하는 반면 묵가의 겸애는 '내가 남을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하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논지로 철저히 호혜적이고 세속적, 실용주의적인 부분을 강조하기에 혹자는 이를 이타적 이기주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겸애든 박애든 현실적으로는 매우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만 제외하면 묵가 쪽이 현실적으로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가 말한 겸애(兼愛)는 사실상 '집단이 극초분할화되어 나라도 가족도 구별짓지 않는 절대평등 및 공유의 세상'이라는데, 이것이 가히 후세에 나타날 공산주의와 같이 2500~3000년을 앞서간 사상가인지는 일단 그런 세상이 성큼 다가오고 나서야 논할 만하다. 그리고 이상적 공산주의도 그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인지는 묵적과의 정교한 비교가 필요한 작업이나 원전의 보존이 문제다.[20]
  • 묵가의 기술혁신을 고평가하는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제자백가 사상들 자체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했으므로 혁신을 반대한 학파를 찾기 어렵다. 다만 다른 제자백가 학파들은 주로 사회구조나 정치구조 개혁에 포커스를 맞추었지만, 묵가는 그뿐만 아니라 공학, 기하학, 물리학 등에도 시대에 비해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음은이 확실하다.
  • 여담이지만 오기와 관련된 책자에서 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묵가의 사람들은 좋은 방어술을 널리 알려 모두가 방어술만 익히면 전쟁이 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기에 우주방어에 매우 뛰어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묵가 사상의 기본인 겸애를 실천하는 방법들이 비전과 비공인 관계로 그는 공격법은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묵자 편명을 봐도 제목이나 내용이 대부분 방어전술 위주로 쓰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치는 것을 악하게 보고 반대로 약한 자가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는 이들이라 전쟁을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봤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방어를 통해 공자(攻者)를 지치게 해 회담장으로 이끌어 화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성문이나 비고림 등 비(備)로 시작되는 일련의 편들을 보면 진정한 우주방어란 이렇다 하고 느낄 수 있다. 묵가의 전쟁관은 비공(非攻)편에서 잘 드러난다.
군주들이 전쟁을 통해 패권을 쥐어봤자, 승전국 백성이나 패전국 백성이나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고, 천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을 할 수가 없게 되니, 애초에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하고, 설령 누가 전쟁을 일으키면 공격자를 우주방어로 꺾어버려서 최대한 전쟁을 하지 않게끔 만들라는 게 포인트.
  •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발사한 퀀텀 통신 위성(Quantum-Communications Satellite)에 묵자(Micius)라는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