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87년까지 계속 살아서 반미 핵개발을 계속했다면 한국은 절대로 반도체 강국이 될 수 없었다


박정희가 일본과 한편 먹고 반미 핵개발을 계속했다면 미국 입장에서 일본 하수인인 한국도 일본반도체와 같이 병신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미일 반도체 전쟁의 역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


87년 노태우로 지도자가 바뀌면서 미국이 원하는 중간단계의 민주주의가 되면서 한국이 반도체 산업을 받아먹을수 있었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wuyJ3YTiA5Q&t=185s


1983년 2월,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이병철 회장은 중앙일보 홍진기 사장에게 전화를 겁니다. "반도체 사업을 하겠다. 신문기사를 내달라." 이 '도쿄 선언'을 시작으로 삼성은 공식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 첫번째 도전은 '64K D램' 개발.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기술이전을 받는 동안 삼성전자의 직원들은 갖은 푸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개발에 착수한지 7개월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 당시 반도체시장은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치열한 점유율 싸움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84년도 까지만 하더라도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의 미국 기업들이 앞서갔으나 NEC,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씨 등의 일본기업들은 높은 수율을 바탕으로 저가로 반도체를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일본기업의 저가 공세에 1984년에 4달러 하던 D램 가격은 1985년 30센트까지 떨어집니다.

이 엄청난 D램 가격 폭락으로 1986년 삼성의 반도체 부분의 누적 적자는 2000억원에 달합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기흥공장 3라인 건설을 지시합니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회장은 이를 강행하고 결국 87년 8월 7일 기흥 3라인 착공을 시작합니다. 이 무리해보이는 투자가 삼성을 세계 1위의 반도체 기업으로 만들 발판이 될줄은 이회장만 알았던 듯합니다.

그 당시 이미 세계 반도체 시장에는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1985년부터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의 일본반도체산업의 불공정성 제소, 마이크론의 일본기업 반덤핑 혐의 제소 등 이어진 미국 반도체 업계의 견제에 1986년 말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두손을 들고 맙니다. “일본정부와 일본 반도체산업계는 미국정부에 반도체 생산원가를 알려주며 미국 반도체 업체의 일본내 시장점유율을 20%로 올린다.” 결국 일본은 굴욕적인 미일반도체협정을 맺었습니다.

미일 반도체 분쟁으로 인하여 인텔은 D램 사업에서 손을 때게 되고 일본은 D램에 대한 투자를 주춤하게 됩니다. D램을 공급할 수 있는 업체가 줄어들자 D램 가격은 급등하고 생산주문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기흥 1, 2라인으로만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고 3라인까지 풀 가동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한해만 삼성은 반도체로만 3200억원의 흑자를 내게 됩니다. 이는 지난 손해를 모두 제하고도 1200억원의 흑자를 챙긴샘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성은 생산, 연구, 개발에 힘써 1989년에는 일본과 같은 시기에 16M D램 개발 그리고 1992년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그 해 D램 메모리 세계점유율 1위가 됩니다.

삼성 반도체가 세계 1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감한 투자와 세계 정세의 변화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