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냐?
1990년에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었지만, 많은 자유 폴란드군은 민주화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폴란드 공산정권은 붕괴했지만, 공산당 때 잘나가던 사람들은 여전히 잘 나갔고, 그들은 자유 폴란드군 출신 인사들을 불편해했다. 폴란드 정부는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보상이나 기념은커녕, 언급마저도 꺼리고 있다. 자유 폴란드군은 폴란드 사회를 구성하는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 시절 폴란드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보잘것없는 자리를 전전하면서 가난 속에 여생을 보내야 했고, 일부는 심지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한편 영국에 남은 이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지금까지도 배신감으로 아예 폴란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 한 명이 영화 웨이백의 모델로 지목되었던[13] 스와보미르 라비츠이며, 폴란드에서 공산 정권이 무너진 지 15년이나 지났어도 2004년 죽을 때까지 끝내 폴란드 땅을 밟지 않았다.
2005년에야 처음으로 영국에서 이들 중 살아 남은 몇 명이 승리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당연히 개인 자격이었고 폴란드 정부에서는 한 사람도 이 행사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현재 폴란드 공화국과 이들의 자손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폴란드에서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일체 가르치지 않아 몇몇 미디어물이나 외국에 나와서야[14]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폴란드인이 적지 않다.
폴란드 공산정권은 붕괴했지만, 공산당 때 잘나가던 사람들은 여전히 잘 나갔고, 그들은 자유 폴란드군 출신 인사들을 불편해했다. 폴란드 정부는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보상이나 기념은커녕, 언급마저도 꺼리고 있다. 자유 폴란드군은 폴란드 사회를 구성하는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 시절 폴란드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보잘것없는 자리를 전전하면서 가난 속에 여생을 보내야 했고, 일부는 심지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한편 영국에 남은 이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지금까지도 배신감으로 아예 폴란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 한 명이 영화 웨이백의 모델로 지목되었던[13] 스와보미르 라비츠이며, 폴란드에서 공산 정권이 무너진 지 15년이나 지났어도 2004년 죽을 때까지 끝내 폴란드 땅을 밟지 않았다.
2005년에야 처음으로 영국에서 이들 중 살아 남은 몇 명이 승리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당연히 개인 자격이었고 폴란드 정부에서는 한 사람도 이 행사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현재 폴란드 공화국과 이들의 자손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폴란드에서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일체 가르치지 않아 몇몇 미디어물이나 외국에 나와서야[14]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폴란드인이 적지 않다.
다급해진 연합군은 이 지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돌파하기 위해 기존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을 계속해서 더 투입하였다. 자신들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연합군 측도 정예부대였는지라 한 번은 양측의 전선이 10 m까지 좁혀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철수 후미를 경계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연합군 정예부대들 간 자존심 싸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연합군 부대 중에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제2군단은 특히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보복심이 뼛속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 제1공수사단의 한 소대장 '하인츠 베르거'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계속해서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기타[편집]
결국 몬테 카시노를 점령한 것은 자유 폴란드군이었다. 물론 엄청난 서방 연합군의 포위공격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전사자 수만도 4천 명을 넘어가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폴란드군 소속 제4소총대대의 경우 대대장이 단 하루만에 2명이 전사했다. 3월 17일에 카롤 판슬라우 중령이 전사하고 유제프 스토예프스키-리브친스키 소령이 지휘권을 인계받았는데 같은 날 전사한 것. 전사자 대부분은 인근 언덕에 묻혔고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연합국은 종전과 동시에 이들을 버렸다. 전후 폴란드는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이렇게 폴란드를 토사구팽할 거였으면 대체 왜 독일에 전쟁을 선언했냐는 비아냥도 현재 폴란드인들 사이에서조차 많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걸 두고 제2차 안슐루스, 제2차 뮌헨 협정이라고 할 정도로 과격한 표현도 쓴다.[8]
자유 폴란드군이 충성을 바친 폴란드 망명 정부는 국경 문제를 놓고 소련과 갈등이 고조되다가 1943년 4월 카틴 학살로 인하여 끝끝내 단교한다. 이 단교는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합국 주요 수뇌부들을 격노케 한다. 단교 이후 스탈린은 거리낌없이 폴란드 공산당을 밀어주면서 폴란드를 위성국으로 삼으려 했고, 1944년 8월 폴란드 국내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군과 악명 높은 디를레방어 여단의 무자비한 공격 끝에 처절히 진압당한다. 이듬해 2월의 얄타 회담을 통하여 서방과 소련은 폴란드 내 자유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합의했지만 이는 기만에 불과했고 폴란드에서는 부정선거 끝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서방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을 취소했다. 승인이 취소됐지만 폴란드 망명 정부는 해체를 거부하고 런던에 잔존한다.[9]
자유 폴란드군이 충성을 바친 폴란드 망명 정부는 국경 문제를 놓고 소련과 갈등이 고조되다가 1943년 4월 카틴 학살로 인하여 끝끝내 단교한다. 이 단교는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합국 주요 수뇌부들을 격노케 한다. 단교 이후 스탈린은 거리낌없이 폴란드 공산당을 밀어주면서 폴란드를 위성국으로 삼으려 했고, 1944년 8월 폴란드 국내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군과 악명 높은 디를레방어 여단의 무자비한 공격 끝에 처절히 진압당한다. 이듬해 2월의 얄타 회담을 통하여 서방과 소련은 폴란드 내 자유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합의했지만 이는 기만에 불과했고 폴란드에서는 부정선거 끝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서방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을 취소했다. 승인이 취소됐지만 폴란드 망명 정부는 해체를 거부하고 런던에 잔존한다.[9]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든 것은 영국의 배신이었다. 1946년 여름, 런던에서 열린 승전 기념 행진에 자유 폴란드군은 초청을 받지 못하면서 이런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영국은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권이 집권하며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공산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상태였고, 따라서 자국에 남아 있는 자유 폴란드군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일부 예외도 있어서 본토 항공전에 영국 공군 소속으로 참전한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은 초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우들과의 의리를 고려하여 영국 정부의 초청을 거절했다.+ 전후 야당지도자로 활동한 윈스턴 처칠은 승전 기념 행진이 있기 사흘 전에 하원 연단에 올라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며 유감을 표명했다.[11]
한편 자유 폴란드군 역시 공식적으로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고난길이 뻔히 보이는 조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망명정부와의 동행을 택한다. 그래도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의 폴란드 제2군 소속의 15000명의 장병들이 종전 이후 폴란드로 귀국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를 확보한 폴란드 인민군들에 의해 붙잡혀선 '반동'으로 몰리며 감시와 처벌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12] 소련이 만든 폴란드 인민군들의 장교진 대다수는 이미 카틴 학살로 인해 식자층이 대다수 살해당하면서 폴란드인이 아니라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이 대다수였다.
서구의 배신은 단순히 정부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종전 직후인 1946년 무렵이 되면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종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떠나지 않은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에 대한 반폴란드 여론이 팽배했다. 이유는 영국 내 체류하는 폴란드 망명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아예 타임지에서 이들 폴란드인들을 잉여 영웅(Surplus Heroes)라고까지 언급했을 정도였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편 자유 폴란드군 역시 공식적으로는 1947년에 해체되었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고난길이 뻔히 보이는 조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망명정부와의 동행을 택한다. 그래도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의 폴란드 제2군 소속의 15000명의 장병들이 종전 이후 폴란드로 귀국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를 확보한 폴란드 인민군들에 의해 붙잡혀선 '반동'으로 몰리며 감시와 처벌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12] 소련이 만든 폴란드 인민군들의 장교진 대다수는 이미 카틴 학살로 인해 식자층이 대다수 살해당하면서 폴란드인이 아니라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이 대다수였다.
서구의 배신은 단순히 정부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종전 직후인 1946년 무렵이 되면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종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떠나지 않은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에 대한 반폴란드 여론이 팽배했다. 이유는 영국 내 체류하는 폴란드 망명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아예 타임지에서 이들 폴란드인들을 잉여 영웅(Surplus Heroes)라고까지 언급했을 정도였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볼락이라는 자유 폴란드군 장교는 영국에서 다음과 같은 수모를 겪었다고 밝혔다.
전쟁이 끝나고 볼락은 군복을 입은 채, 그의 영국인 여자친구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 한 대가 내 앞에 정차하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신사가 내리며 볼락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오, 소위. 내가 질문 하나 해도 되겠소? 당신네 폴란드인들은 도대체 얼마동안, 우리 영국 빵을 축낼 작정이요? 당신은 전쟁이 끝난 것도 모르는 거요?"
이런 수모를 겪은 볼락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로 귀국했다. 그는 군복을 입은 채 귀국했고, 폴란드 비밀경찰은 24시간 동안 그를 감금했다. 심문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도 당신이 폴란드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아. 우리는 당신같은 사람이 필요없어."
볼락은 곧 석방되었지만, 이후 오랫동안 변변치 않은 일자리들만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는 폴란드 공산정권 치하에서 단 한 번도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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