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마 시간이 지나면 필히 바뀔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너무 많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북침의 우려가 잔존했고, 아직도 초가집에 사는 미개한 국가였다. 육사 8기 전두환은 육사 생도로서 직접 박정희를 찾아가 혁명의 이유를 물었다. 박정희 대답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다. 전두환은 육사, 해사, 공사 생도를 모두 집결하여 서울 시내 시가 행진으로 혁명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민심은 박정희에게 넘어왔다. 지금은 쿠데타라고 칭하지만, 당시는 혁명이라고 했다. 박정희가 암살 당하지 않고 권좌에서 내려와서 권력을 민간에 이양했으면 아마 혁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룬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현대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들었다면, 박정희는 현대 대한민국의 뼈대를 세웠다.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부국강병을 이뤘다. 당시 박정희의 활약으로 호남인들도 박정희를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지역 감정에 호소하며 박정희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다. 경부고속도로, 여수 산업 공단 등등 산업 발전 정책을 모두 반대하고 그의 모든 정책에 딴지로 일관했다. 그의 정치색은 현재 민주당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호남인들은 이런 김대중의 활약을 모르고 역대 정부가 차별해서 호남에 공장이 없다고 한다. 호남이 발전하지 못한데에는 김대중 잘못이 크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박정희 암살 사건을 지휘했다. 박정희는 암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삼군 시가 행진으로 신뢰가 두터운 전두환이 자신이 피살 당할 시 총 수사지휘를 하도록 미리 손을 써 놓았다. 그래서 당시 알려지지 않은 전두환이 수사를 진행하며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로서, 능력이 미천하고 열등감이 많지만 박정희가 고향 후배이기에 옆에 두었다. 박정희에게 실수하면 줄곧 맞기 일쑤였다. 그리고 차지철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시해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될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시해 전 부모의 묘자리고 바꿨다. 정승화는 그의 오른팔로서, 김재규는 그를 합동참모총장으로 앉힌다. 김재규는 박정희 시해 당시 정승화를 시해 장소 옆에 초대했고, 작업이 끝나자 정승화와 김재규는 사건 현장을 빠져 나간다. 정승화는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정승화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엉뚱한 장소에 정신 나간 김재규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김재규는 범인으로 몰려 조사를 받고 바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


김재규는 영웅도 아닌 한낫 얼간이 시정 잡배이지만, 박정희를 묻어 버리려는 좌파에 의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정승화도 김재규와 같은 인물로서, 전두환이 연행하여 군법 재판에 회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전두환은 권력 의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본인 및 그의 육사 동기들과 하나회 멤버들은 그가 권력 욕심이 없고 우연히 학생운동이 거세지고 안보가 위협받다 보니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굉장한 권력 의지가 있었고, 그의 집단은 이를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였고, 매우 영리했고 민첩했다. 당시 초엘리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3김은 이런 상황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학생 운동에 불을 지폈고, 정부에 거센 항의를 했다. 빨리 대선을 치뤄 대통령을 뽑자고. 3김도 물론 권력의지가 대단했다. 박정희라는 거물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대통령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차일피일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군부는 말한다. 3김이 가만히 있었으면 권력이 평화롭게 민간에 이양 되었을 것이라고. 


5.18 광주 민주화 사태 당시 계엄사령관은 이희성 장군이었다. 광주민주화사태는 초동 진압 실패했는데, 초동 진압 맡은 이들 정웅 윤흥정 안병하였다. 이들은 초동 진압에 실패하였지만 현재 호남지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대중을 진압할때는 많은 수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해산하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안병하는 광주경찰청장으로 시위 진압의 직무를 유기를 하고 경찰을 모두 해산했다. 집에서 술 마셨다. 시위의 해산에는 경찰력이 매우 중요한데 그는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고로 그가 광주사태의 원흉이다.


정웅과 윤흥정은 시위 현장을 가보지도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민들을 과잉 진압하여 사단이 났다. 시민군은 뿔나서 무기고 털고 교도소 수감자 탈출시켰으며, TNT 20톤을 전남도청에 적재 시켰다. 일반 시민들이 그런 군사 작전이 가능한가? 당시 무선 주파수 수치가 급격하게 올라갔는데 북한으로 의심된다고 한다. 결국 진압군 대규모 투입하여 진압 시키는 비극이 발생한다.


당시 민주화 항쟁을 진압하는 군의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자위권이 있음을 당시 시위대에게 선포하였다. 군인이 더 이상 공격 당하면 방어를 위해 공격할 있다는 의미다.  당시 300여명이 사망이나 실종되고, 260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치의 1/10의 군인과 경찰이 사망하고 부상 당했다. 당시 공수부대나 진압군은 인근 병력을 소집해야 했으므로, 40%가량이 호남인들이었다.



전두환은 광주사태에 책임이 없다고 살아생전 목청을 높여 외쳤다. 당시 계엄 사령관도 전두환은 나의 까마득한 후배이고, 내가 상관이었기에 그는 광주사태와 관련 없다고 말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이미 재판을 받아 형을 받았음에도, 김영상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 명목으로 다시 재판장에 세웠다


박정희 사망시 3김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샴페인을 떠드려 환호했고, 자신들이 차기 대통령이 바로 될 줄 알았다


주변 사람 왈, 전두환은 너무 빨리 대통령이 되었기에 정치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