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고, 원래 군출신은 임용 불가 전통.
1명인가가 예외.
아국은 왜 저거 안지키냐?
초대 신성모가 개판쳐서,
군부출신에, 보병 포병 기갑 군사령관 전선 야전 지휘관경력자 선호.
신성모도 모르면 아가릘 닥치고홐.
그는 처음부터 전투경력이나 지휘경력이 전무한 채병덕을 육군참모총장에 앉힌 장본인이지만, 사실 채병덕은 민족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아서 국방부 참모총장을 거친 낙하산 인사였다. 그렇게 전쟁이 발발하자 채병덕은 물론 신성모 본인도 군사적인 무능함, 부정부패, 문경 양민 학살사건 등에 대한 은폐, 한강 인도교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인해 국방장관으로서의 행적은 옹호해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오죽하면 6.25 전쟁 때의 행적 때문에 욕을 먹던 다른 인물들도 '그래도 나름대로 공적도 없진 않다', '능력이 없던 건 아니었고 다른 직책에서 활동했다면 적어도 욕은 안 먹었을 것'이라는 식의 재평가라도 받지만 이 자에 대한 재평가는 사실상 없다.
그나마 언행이라도 일치하면 욕이라도 덜 얻어먹을 텐데 전쟁 발발 전 북진통일을 하자는 자가 정작 병력 훈련을 게을리한 데다가 심지어 전방을 지키고 있어야 할 지휘관들을 불러다가 육본 장교클럽에 모아놓고 술파티를 벌이는 등 신성모의 언행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자극과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는 거짓명분을 제공했을 뿐 국방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실책으로 인해 김일성이 6.25 전쟁 초반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므로 그가 북한군의 간첩이었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병폐와 삽질은 심각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역사가들이 "신성모는 북한의 간첩이었는가?" 를 연구한다. 이전에 독립운동가로서 나름 커리어를 쌓고 열심히 싸운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타락한 인간이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문민통제를 추진하는 데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문민통제를 반대하는 측에서 자주 예시로 드는 인물이다. 문민통제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그를 언급하며 "문민통제는 필요하지만 이런 자가 등장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할 필요 또한 있다"면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다만, 상술한 대로 그도 중화민국 해군 출신에 상선사관으로 상당 기간 복무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문민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상선 사관이라는 신분 자체가 전투를 수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신성모가 전투임무를 수행한 적도 없기 때문에, 결코 군출신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하는 것이다. 2차대전기 리버티쉽에 승선한 상선 사관이나 일본 본토와 필리핀을 오간 상선 사관들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으로, 때로는 자기 나라에서 유공자로 평가받지만 군인은 아닌 것과 같다. 상선 사관이 해군 장교와 동일하게 취급되던 시기는 범선시대다.
그런데 2009년에 부산지방해양항만청에서 해기사 명예의 전당을 준공하면서 그를 최초로 선정하고 흉상 조형물까지 헌정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원인은 의외로 진지하였으니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해당 이시형 박사와 함께 헌정된 이유는 그가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Extra Master[27]을 취득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태동기에 있던 한국 해운업이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한 업적 때문이다. 국가 기반사업 육성 차원에서 정부의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던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에 흡수될 뻔한 것을 막은 것도 이 사람이다. 만일 당시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와 통합되었다면, 역시 지원금 문제로 해군사관학교와 해양대학이 통합되어 있는 필리핀으로부터 볼 수 있듯이 해군도 해운업계도 망조를 탔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해기사협회와 항만청 측에서도 신성모의 병폐를 인정하였고 논란 역시 많았으나, 정치가 신성모와 해기사 신성모는 별개로 보고 해기사로서의 공과만을 평가하기로 한 결정 끝에 헌정자로 결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해양사를 평가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특유의 연공서열과 기수에 묶여 있는데다 일반의 관심도 없고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도 몇 안 되는 상황 때문이다. 결국 인재가 없고, 누굴 선정하더라도 논란을 못 피하는 상황. 따라서 이 사람을 어쩔 수 없이 헌정자로 올릴 수밖에 없던 셈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이승만 정부에서 인재 선발과 배치를 잘못 했다는 대표적인 사례다. 만약 신성모가 해운 관련 업무의 장관직을 수행했다면 무난한 장관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런 논리로 따지면 진짜 모든 부문에서 무능하고 악랄하고 탐욕스러웠던 희대의 악인 원균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들 변명이 가능하기에 사실상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 하필 군사적 재능이 전무한데 낙하산으로 국방부장관을 맡으면서 6.25 전쟁 초반에 국군의 X맨이자 대재앙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무능함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일거에 말아먹은 원균에 필적하다고 볼 수 있으며, 국민방위군의 예산을 횡령한 부분에서는 구한말 구식군대의 봉급을 횡령해서 임오군란을 유발하여 조선 멸망 테크의 시작점이 된 민겸호와 비슷하다.
하지만 맥나마라는 JFK의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 스스로 훗날 후회할 결정을 내렸다. 오늘날 맥나마라에 대한 비판은 8할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며, 이는 맥나마라의 흑역사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남베트남이 상상 이상의 막장이었음을 알고도 도미노 이론에 지레 겁먹어서 통킹만 사건 같은 작은 일에 본격적인 개입에 나섰고, 돈만 들이고 효과는 미미했던 롤링썬더 작전은 역사가들이 훗날 그에 대한 평가를 낮게 보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맥나마라도 초창기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다가 결국 찬성 쪽으로 돌아섰는데, 계속해서 돈은 들이는 데 효과가 없으니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려 했지만,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11] 줄창 불벼락을 내려댔다. 단적으로 공산권에서 계속 들어오던 전쟁수행 물자나 각지에 산개한 북베트남 산업시설의 분포도만 봐도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전쟁수행 능력을 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LBJ 행정부에서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줄어들었고, 1968년 2월 29일 클라크 클리퍼드에게 바통을 넘기며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7년의 재임기간은 역대 미 국방장관 중 최장기 집권이었으며, 퇴임하며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맥나마라가 유일하게 건진 긍정적인 성과는 M14 소총을 제식 소총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M16 소총을 도입한 것이다. 국방장관 재임 당시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던 커티스 르메이와 의견이 일치한 유일한 안건이었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하위 지능자를 입대시키는 Project 100K[12]를 제안했으나, 이렇게 뽑힌 미군 병력들은 베트남의 최일선에서 동료 미군 장병들에게 'McNamara's Follys(맥나마라의 바보들)', 'McNamara's Morons(맥나마라의 머저리들)'이라는 경멸을 받으며 결과적으로 크나큰 실수로 평가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장애인 징병 문서의 미국 항목을 참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 종전 20년 후에 회고록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을 내면서 미국이 실수했고, 자신이 잘못된 전쟁을 일으켰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 자서전에서 ‘베트남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몸서리치게 잘못된 전쟁이었다(Vietnam war was wrong, terribly wrong)’라고 말하며, 베트남전쟁이 방향도 잃고 목표도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고 스스로 비판했다.
80년생 45세 미국 국방부 장관이 미국의 패망을 촉진할거다라는 말은 한적 없고. 60년대 베트남 전쟁 수렁 로버트 맥나마라 재림인지 두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