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6.25사변 전후로 

매우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죠.


1947년 

당시 남한의 상황은

집권세력의 부재로 

한국을 실효지배중이던 미군정은

도산안창호 독립세력 계열과 친일계 이승만 계열중

하나를 택해야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지지율이 열세였던 친일계 이승만은 

남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유력 대통령 후보 김구와

독립세력이 못마땅했습니다.


친일계가 정치권에서 밀려나면

그동안 한국 위에서 군림하던

기득권의 지위를 전부 내려놓아야 하는 궁지에 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어떻게해서든 초대 대통령직에 당선되어야 했었고

유력한 초대 대통령 후보 김구를 암살하는 만행을 벌입니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 간접선거로

친일계 인사들의 몰표를 받아 초대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외교부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본인 마누라까지 성상납 로비를 시도 하다가

미인계가 성사가 되지 않으니까 

정적인 이재명을 사주해 암살하려했듯이 

김구를 암살하는 것도 모라자


남한에서 식량난으로 소요사태가 벌어지는 환란을 틈타

서북청년회 같은 반공주의 집단을 동원해

독립세력을 공산세력으로 둔갑하고

빨갱이로 몰아 마녀사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세력이 정치적 기반을 잃게되는 계기가 된것입니다.


독립후에도 아직까지 

군경 통솔권을 갖고있던 친일계 이승만은

본인들이 일망타진해 국내 혼란을 잠재울수 있다는 

내부 통제력을 인정받는다면

미군정의 신임를 얻고 

장기 집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승산을 바라봤습니다.


하필이면 전국이 혼란스런 시국에서 

소외되던 제주도를 

반공 실적을 얻기 위한 하나의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거주인구수가 얼마되지 않던 제주도에선

남한에 잔존하던 일제 경찰들 

그리고 국군이 다수 동원되어 

반란세력 섬멸이라는 미명하에

1947년 3월 1일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자국민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일제통치 시기 

지역별 주민등록 명부를

일제경찰들이 갖고 있었음에도 

검문과 신원확인도 없이 

제주도의 모든 산림지역을 불태우고  

가가호호 총기난사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학살행위입니다.


제주도민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전후로 수십년 은폐되었다가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고건 국무총리가 조건부로 채택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2003년 발간되어 

당시 이승만 친일 정부가 주동했던 제주도 주민 학살을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