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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에 의해 억류된 여호와의 증인들
나치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탄압을 다룬 영어 위키백과 문서
여호와의 증인 온라인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나치 관련 기록물
미네소타 대학교, 홀로코스트와 인종청소 연구ㅡ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1933-45년 동안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여호와의 증인들, JOHANNES S. WROBEL 저술[4]
미합중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여호와의 증인ㅡ나치 시대의 희생자들
홀로코스트 시절의 여호와의 증인들(1933-1945)
"(네덜란드에서) 나치에게 극단적인 박해를 받은 것은 한 종교 단체. 즉, 여호와의 증인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네덜란드 왕국」(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네덜란드 역사가 루이 데 용 저.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네덜란드 왕국」(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네덜란드 역사가 루이 데 용 저.
"their courage and defiance in the face of torture and death punctures the myth of a monolithic Nazi state ruling over docile and submissive subjects."
"나치가 자행한 고문과 살인 앞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보여준 용기와 비타협정신은 나치 집권기 동안 사람들이 나치에게 복종했다는 세간의 인식을 환기시켰다." ㅡ시빌 밀튼(Sibil Milton), 역사학자
“[증인들은] 폭력 행위나 무력 행사를 하는 데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다. 증인들은 정치적 중립을 신봉하였고, 따라서 히틀러를 위해 투표하거나 히틀러식 경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이 나치의 분노를 촉발하여 증인들이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국가 사회주의가 그러한 거부 행위를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역사학 교수 로버트 P. 에릭슨, 유대학 교수 수재너 헤셸 저 「배신—독일 교회와 유대인 대학살」(Betrayal—German Churches and the Holocaust)
나치 독일이 독일 사회를 장악한 1933년 전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을 상대로 악랄한 탄압을 일삼았다. 단일 종교 상대로는 유대교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종교 박해 수준으로 나치의 집권 기간 동안 본국 독일에서 신도의 절반이 넘는 13,000명이 수감되었고 4,500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200~500명은 수용소에서 간수의 폭력행위와 굶주림, 질병, 생체 실험으로 사망하였으며 그 중 250명은 처형당했다.[7]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 점령지에서의 탄압과 비공식 통계를 감안하면 이보다 더 많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죽거나 다쳤다.
나치의 공식 문서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IBV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이들 조직을 가리키는 독일어 공식 명칭(Internationale Bibelforscher-Vereinigun, ‘만국 성경 연구회’라는 뜻임)의 약자였다. 나치는 증인들이 보라색 삼각형이 달린 죄수복을 입게 했으며(위의 영상 참고), 이 표시 덕분에 증인들은 수용내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치의 공식 문서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IBV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이들 조직을 가리키는 독일어 공식 명칭(Internationale Bibelforscher-Vereinigun, ‘만국 성경 연구회’라는 뜻임)의 약자였다. 나치는 증인들이 보라색 삼각형이 달린 죄수복을 입게 했으며(위의 영상 참고), 이 표시 덕분에 증인들은 수용내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치 독일이 이토록 극심하게 여호와의 증인을 탄압한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침략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독일 국방군, 친위대, 히틀러유겐트 등 독일의 어떠한 군사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충성이나 나치식 경례를 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폭력에 반대하라, 세속 국가에 충성하지 마라는 교리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저한 국수주의, 군국주의 정권이었던 나치는 당연히 비폭력주의를 고수한 여호와의 증인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일본 제국 치하에서도 신도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났는데, 그 중 한국에서의 사례는 등대사 사건이란 이름으로 독립운동사에 기재돼 있기까지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 정부로부터 탄압받은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철저한 국수주의, 군국주의 정권이었던 나치는 당연히 비폭력주의를 고수한 여호와의 증인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일본 제국 치하에서도 신도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났는데, 그 중 한국에서의 사례는 등대사 사건이란 이름으로 독립운동사에 기재돼 있기까지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 정부로부터 탄압받은 적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독일에서 비벨포르셔(성경 연구생)로 불렸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많은 성서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1933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신도는 총 8만 3941명이었는데, 그 중 거의 30퍼센트가 독일에 살고 있었을 정도로 신도들은 활발한 활동을 했다.[8]
나치 정부는 일찍이 1933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독일 전역에서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도덕관과 관행, 교리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증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하일 히틀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하일은 구원이란 의미다. 증인들은 군대와 관련된 일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는데, 나치 정권은 이를 반국가 행위로 간주하였다.
신도들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부터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불시에 가택 수색을 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구타와 체포와 투옥을 당했다. 특히 나치 돌격대의 격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의 교세는 위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도들 중 일부는 나치의 종교 탄압을 성토하기까지 했다. 1939년 9월 1일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인원 중 5~10퍼센트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치 정부는 일찍이 1933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독일 전역에서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도덕관과 관행, 교리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증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하일 히틀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하일은 구원이란 의미다. 증인들은 군대와 관련된 일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는데, 나치 정권은 이를 반국가 행위로 간주하였다.
신도들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부터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불시에 가택 수색을 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구타와 체포와 투옥을 당했다. 특히 나치 돌격대의 격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의 교세는 위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도들 중 일부는 나치의 종교 탄압을 성토하기까지 했다. 1939년 9월 1일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인원 중 5~10퍼센트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 받은 감시 보고서 때문에 얘기하고자 할 게 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소련을 점령하고 시간이 지나 통치가 안정화되면, 영토를 분할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온갖 종교인들과 평화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겠지. 솔직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과 전쟁협력에 반대한다는 점 외에는 아주 우리에게 협조적일 수 있다. 음주를 하지도 않지, 담배를 피지도 않지, 정직하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일꾼이다. 값진 인력이 틀림없다."
Some information and observations of recent date have led me to draw up plans that I would like to bring to your attention. This concerns Jehovah’s Witnesses. . . . How are we going to govern and pacify Russia when . . . we will have conquered vast areas of its territory? . . . All forms of religion and the pacifist sects must be supported . . . , among all the others the beliefs of Jehovah’s Witnesses. It is well-known that the latter have characteristics incredibly positive for us : Apart from the fact that they refuse military service and anything to do with war . . . , they are incredibly reliable, do not drink, do not smoke; they are relentless workers and of rare honesty. For them the spoken word stands. These are ideal characteristics . . . , enviable qualities.
ㅡ하인리히 힘러, 게슈타포 책임자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금지된 이 종파는 전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불법 집회를 열고 '하느님의 증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범죄이다', '여호와께서 박해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벌하실 것이다'와 같은 구호가 적힌 전단을 붙이고 있다. 보안경찰이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에 대해 더욱 강경한 조처를 취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활동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ㅡ독일 보안경찰(지허하이츠폴리차이)이 1941년 4월에 작성한 기밀 문서인 「네덜란드 보고서」(Meldungen aus den Niederlanden)
유대인, 집시와 다르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향서에 서명하여 신앙을 포기하거나 독일군에 입대하여 탄압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9]+ 결국 이 시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다하우 강제수용소, 작센하우센 등의 여러 수용소에 끌려갔다.
1937년 10월,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유로 수감된 아우구스트 디크만(August Dickmann)은 1939년 9월 4일(전쟁 발발 3일 후) 신분증에 서명하라는 게슈타포의 요구에 불응하여 독방으로 보내진 뒤 다른 모든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디크만을 처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수용소장의 요구로 15일에 다른 신도들과 친형제가 보는 앞에서 SS에게 총살당했다. 이틀 뒤 「뉴욕 타임스」지 독일 외신 보도에서는 “29세의 아우구스트 디크만이 ··· 이곳에서 총살 집행 대원들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게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점도 언급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우구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가 공개적으로 처형한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17세 때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1939년 9월 15일, 양심에 따라 군 복무를 거부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슈타이나허는 빈에서 6주간 구금된 뒤에 독일 베를린에 있는 모아비트 교도소로 이송되어 미결 상태로 구금되었으며 첫 공판을 받는 날인 11월 11일 전쟁을 방해한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것이므로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1940년 3월 2일에 독일 제국 군사 법원은 사형 선고를 지지하였고 결국 4주 뒤인 3월 30일, 슈타이나허는 베를린의 악명 높은 플뢰첸제 교도소에 있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처형되기 단 몇 시간 전에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 편지를 썼는데 세 줄은 나치가 삭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7세 때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1939년 9월 15일, 양심에 따라 군 복무를 거부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슈타이나허는 빈에서 6주간 구금된 뒤에 독일 베를린에 있는 모아비트 교도소로 이송되어 미결 상태로 구금되었으며 첫 공판을 받는 날인 11월 11일 전쟁을 방해한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것이므로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1940년 3월 2일에 독일 제국 군사 법원은 사형 선고를 지지하였고 결국 4주 뒤인 3월 30일, 슈타이나허는 베를린의 악명 높은 플뢰첸제 교도소에 있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는 처형되기 단 몇 시간 전에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 편지를 썼는데 세 줄은 나치가 삭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43년에 체포되어 겨우 19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안제이 샬보트(Andrzej Szalbot)는 “군복무를 거부하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증언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증인 조직에서 탈퇴한다는 뜻을 밝히는 동시에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즉각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유대인 대학살로 유명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도 많은 신자들이 수감되었다. 1940년 6월부터 종전까지 5년 동안 최소 110만명의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갔는데 그 중에는 40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수감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으며, 그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증인 가운데 35퍼센트 이상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박물관 웹사이트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역사에 관한 문헌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수용소 기록에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나옴)에 대해 간단한 언급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도덕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때 이들에게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서로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매일 저녁 점호가 있기 전에 함께 만났으며, 다른 수감자들과 성경에 관해 토의하는 비밀 모임들도 조직하였다.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나치에게 점령된 우크라이나에서도 격렬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집들은 창문들이 박살나고, 많은 신도들이 심한 구타를 당했다. 겨울철에 어떤 신도는 성호(聖號)에 십자가를 긋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찬물 속에 강제로 몇 시간 서 있거나, 막대기로 50대의 매를 맞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부역한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종종 고발했는데, 일례로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던 일리아 호부차크가 가톨릭 사제의 밀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유대인 대학살로 유명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도 많은 신자들이 수감되었다. 1940년 6월부터 종전까지 5년 동안 최소 110만명의 사람이 이곳으로 끌려갔는데 그 중에는 40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수감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으며, 그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증인 가운데 35퍼센트 이상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박물관 웹사이트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역사에 관한 문헌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수용소 기록에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나옴)에 대해 간단한 언급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도덕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때 이들에게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서로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매일 저녁 점호가 있기 전에 함께 만났으며, 다른 수감자들과 성경에 관해 토의하는 비밀 모임들도 조직하였다.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나치에게 점령된 우크라이나에서도 격렬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집들은 창문들이 박살나고, 많은 신도들이 심한 구타를 당했다. 겨울철에 어떤 신도는 성호(聖號)에 십자가를 긋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찬물 속에 강제로 몇 시간 서 있거나, 막대기로 50대의 매를 맞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부역한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종종 고발했는데, 일례로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던 일리아 호부차크가 가톨릭 사제의 밀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1940년에 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를 짓는 일에 동원된 리하르트 루돌프. (지붕 위, 맨 오른쪽)
리하르트 루돌프란 신자는 나치 치하에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다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를 거쳤고, 그 가운데는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와 노이엔가메 수용소도 있었는데, 그 두 수용소에서 30만 명 이상이 수감 생활을 했으며 14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사망하였다. 1944년에 루돌프는 노이엔가메 강제 수용소의 부속 시설인 잘츠기터-바텐슈테드로 이송되었고, 종교적 신념 때문에 탄약 생산과 관련된 작업을 일체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 처형당할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종교적 신념에 감명을 받은 한 친절한 친위대 장교가 그를 식품 수송 트럭에 숨겨 준 덕분에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11]
오스트리아에 있는 나치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도 여호와의 증인 450명이 수감되었다. 수용자들을 인솔하던 사령관은 “성경 연구생은 여기서 한 사람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다."라고 협박했지만, 신자 중 한 명인 마르틴 푀칭거(Martin Pötzinger)는 다하우와 마우트하우젠과 구젠에서 9년간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아서 나중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부 성원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마우트하우젠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에 대해 “게슈타포는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고 증언하였다.
마우트하우젠에 있던 일부 증인들은 나중에 구젠으로 이감되었는데, 구젠 강제 수용소는 주로 “살인 수용소”로 운영되었다. 증인들은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밤에 소규모로 모여 기억에 의존해서 성구들을 토의했으며, 한 번은 성경을 한 권 구한 적도 있었는데, 그 성경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돌려 보았으며 침대 밑에 숨겨 놓고 얼마 되지 않는 자유 시간에 읽곤 했다고 한다. 폴란드인 수감자 5명이 신자들과 성경을 공부했고 침례용으로 만든 길쭉한 나무 물통에서 비밀리에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증인인 프란츠 데슈(Franz Desch)는 친위대 장교에게 성경의 소식을 전했고, 그 장교는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치 친위대(SS) 장교나 병사들이 여호와의 증인 수감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여증에게 동조하거나 신도로 입단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치친위대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베벨스부르크 성에서 복무 중이던 고틀리에프 베른하르트는 니더하겐 강제수용소에 있던 에른스트 슈페히트란 여증 수감자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자신에게 인사할 때 '하일 히틀러'라고 하지 않고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대화를 시도하였다. 슈페히트는 하일은 독일어로 구원이란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기 때문에 하일 히틀러라고 말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여호와의 증인에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진군해오자 힘러는 니더하겐 수용소의 여증 신자들을 집단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베른하르트가 수용소 책임자를 제지하여 에른스트를 포함한 여증 신도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후 이 장교는 아내와 함께 여증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연합군의 승리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독일 국방군과 소련군에게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큰 박해를 받았다. 이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굴라크 문서를 참조할 것.
1945년 5월 구젠 강제 수용소. 마르틴 푀칭거(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음)가 석방 직후에 23명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독일 한정으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 중 생존자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총 거부 행위는 유럽 국가들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평화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체복무제 논의 때 찬성하는 쪽에서도 나치의 여증 탄압을 예시로 드는 경우가 많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독일 한정으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 중 생존자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총 거부 행위는 유럽 국가들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평화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체복무제 논의 때 찬성하는 쪽에서도 나치의 여증 탄압을 예시로 드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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