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편집]
소련군 병사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수는 무려 200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피해 여성들은 한 차례만 강간당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윤간당했으며 많은 경우 60~70회에 이르는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피해 여성의 나이는 8세에서 80세까지 다양하며, 강간 피해자 중 관련 사망자는 24만 명으로 추산된다.

베를린에서는 강간 피해자 10%가 강간에 의한 내상 혹은 소련군에 의한 살인으로 희생되었고, 생존자 20%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였으며(11,560건) 이 가운데 90%의 여성들이 낙태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체 신생아 가운데 5%가 소련인에 의해 강간당해 출산한 사례였는데(1,156명) 피해자 200만명의 추산 통계는 상기된 숫자들과 비가임 여성(월경을 하지 않는 유년기 소녀들과 갱년기 여인들)의 강간 통계들을 합산 및 역산한 후 전체 독일에 소급적용하여 산출된 수치다.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 에이스인 에리히 하르트만의 회고록에는 강간을 일삼는 소련군과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미군과의 충돌도 서술되어 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3명이 소련군이 나와 그라프, 다른 조종사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고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미군들이 소련군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는데 난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죠. 거기에 젊은 미군 대위 한 명이 있었는데 그가 타고 있던 셔먼 전차에서 뛰어내려 독일 여자를 두들겨 패고 있던 러시아 병사에게 권총을 손에 들고 똑바로 겨눴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병사들은 그녀의 옷을 잡아찢고 있었지만요. 셔먼 전차병들 중 한 명이 포탑을 돌려 주포를 소련군들에게 향했습니다. 그 대위는 소련군들에게 러시아어로 멈추라고 외쳤으나 소련군들은 웃어넘기며 미군 대위와 다른 미군 병사들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소련군들은 50명 정도였고 미군들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죠. 대위는 즉시 무전기로 이 악몽같은 소행들을 멈추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상부에 알아봤지만, 돌아온 소식은 대위와 우리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미군들은 해당 지역에서 떠나라는 맥빠진 답만이 돌아왔고 젊은 미군들의 눈을 보니 우리를 돕고 싶어하는, 자신들의 동맹군을 죽여서라도 그 민간인들을 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군들은 자신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이나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명령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옷이 찢긴 그 여자는 더러운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빌헬름의 동생인 프리트헬름이 가슴에 총상을 당해 실려왔을 때 가망없는 환자를 포기하려는 군의관을 설득해서 그를 살리게 된다. 깨어난 프리트헬름은 샤를로테에게 자신의 형(빌헬름)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게 되고, 그 말을 들은 샤를로테는 좋아한다는 고백도 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게 된 것에 절망하고 만다.

그 후 절망하던 샤를로테는 나이가 까마득하게 차이나는 야전병원의 군의관인 얀과 성관계를 맺고[샤를로테에] 상처가 약간만 나으면 도로 전선으로 끌려가야 하는 병사의 상처를 일부러 악화시켜 후방으로 보내주던 것을 동료 간호사에게 들켜서 다투기도 하는 등 사람이 전쟁 통에 여러모로 망가진다. 하지만 프리트헬름의 말과는 달리 빌헬름은 500집행유예대대에 소속돼 있었고, 야전병원에서 그와 재회한 샤를로테는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어준 것을 후회해 빌헬름에게 '차라리 너는 죽었어야 했다'며 절규한다. 사정을 모르는 빌헬름은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를 보고 혼란스러워 하며 절규한다.






초기에 소련군은 강간에 대한 엄벌은커녕 강간을 방임하였다가 그로 인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통제가 안 되기 시작하자 뒤늦게나마 보복성 전쟁범죄 단속을 시작해 엄벌했으며[8], 장교나 정치장교들이 해당 현장을 목격했을 경우 구두 경고 없이 바로 권총을 꺼내들어 피해자의 눈앞에서 가해 병사를 즉결 총살하기도 했다. # 피해자가 1만 명대일 경우는 적당히 하라는 구두경고가 고작이었으나 비공식 집계만으로도 1백만 명 이상이 강간당하자 그제서야 불명예 제대와 수용소행, 총살형으로 경고하기 시작했고 이미 상당한 피해와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한 뒤였다. 하필이면 유복한 베를린의 가정에 술을 보관한다는 소문이 퍼져 오랜만에 이 약탈한 술들을 마시고 거나하게 정신줄을 놓은 다음 날에야 광란을 벌였음을 알게 된 일도 많았으며, 소련군 장성들은 이에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 소련 포로들과 등가교환할 점령국 시민들을 죽여선 안 된다는 이유로 소련 여군들을 차출해 베를린의 성범죄 피해자를 진료하게 했다.

창작물에 등장한 사례로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에서의 하루>에서 언급된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굴라크에 끌려온 소련군 병사 2명의 사례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는 언급된 약탈과 성폭행을 저지른 사람이 총살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간호병사는 훗날 알렉시예비치에게 이 일화를 말하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진 않지만 이것이 바로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해당 피해 여성은 치료를 받고 회복하라는 의미로 큰 빵을 한 덩이 받고 떠난 후 행방에 대해 알려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동포들을 죽인 나치에 대한 반감에 기계적으로 환자를 치료했다는 소련 의사들과 간호병들에 따르면 그들이 베를린을 탈환한 후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전적으로 독소전쟁에 대한 보복성을 띠고 있는데, 독소전쟁은 알아도 이러한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독일도 전쟁 동안 수많은 소련인 여성들을 강간하고 학살했으며 저지른 범죄가 너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셈이다. 소련계 유대인이자 기관지 '붉은 별'의 칼럼니스트 일리야 예렌부르크는 이제부터 독일인은 어느 누구라도 사람으로 대우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선전물을 썼는데, 베를린을 탈환한 소련군들은 당시의 자신들을 일컬어 그렇게 풍족한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조국을 침략한 독일을 용서할 수 없어 그들의 인종 청소에 버금가는 짓으로 복수할 각오 덕분에 살아 있었다고 말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익명으로 알렉시예비치에게 베를린의 아동과 청소년 강간까지 저지른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한편 폭력적인 강간을 최소화하고자 장교 등의 고위 계급들을 만나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여성들도 소수 존재했다. 극한 상황에서 물리력이나 권력이 있는 남성에게 의존하여 성범죄를 포함한 범죄를 피하려는 여성들의 사례는 자주 발견된다.

실화를 다룬 저서 '베를린의 여인'에는 미군의 포격을 머리에 맞는 것보다 뭐든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낫다고는 하면서도

자칫 진짜로 끔찍하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윤간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 장교의 현지처로 들어가 안전을 보장 받는 독일 거주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노벨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도 어머니와 누이가 겪은 불행을 언급하였는데, 어머니가 내 딸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스스로 소련군에게 몸을 내주었으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한편 그 와중에도 독일 여성 마르타 쿠르츠만의 회고에 따르면 최소한의 인간애와 천운으로 위기를 넘긴 순간도 있었다. 쿠르츠만과 여동생을 붙잡은 소련군은 이들이 막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중인 것을 알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긴 했으나 순순히 놓아주었다고 한다. 추가로 심지어 고층 건물 옥상으로 도망치니 다리가 아팠는지 추격을 포기한 그들을 피할 수 있었다거나 변소에 일부러 빠져 혐오스러운 몰골이 되고, 흉측하게 분장하거나 가족을 닮았다는 이유로[9] 화를 면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누린 여성은 드물었으며 당시에는 생존자들 사이에 '당했냐고 묻지 말라, 몇 명에게 몇십 번 당했냐고 묻는 것이 온당하다'는 식의 자조적인 자학 유머까지 유행할 정도로 참혹한 지경이었다.

소련군은 독일 점령지뿐만 아니라 만주, 심지어 한반도까지 점령하여 피아 구분 없이 강간과 약탈을 일삼았고 현재 러시아 연방군도 동일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행운(?)의 일본 병사들 이야기


1944년 미얀마( 버마) 주둔 어떤 일본군 부대에서 일어난 실화 한토막.

웬 현지 미얀마 여인이 찢어 진 옷을 걸치고 울부짖으며 일본군 부대를 찾아 왔다.

일본 병사 세 놈이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저렇게 강간했다는 것.

부대장은 즉시 조사를 명명, 용의자 3명을 잡아 여인에게 보였더니 맞다는 것이다.

조사관이 넌즛이 물었다. 강간후 죽였으면 탄로 않날텐데 왜 그냥 살려 두었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죽이려 했는데 죽이기엔 어쩐지 찜찜하여 살려 두었다. 두고온 마누라나 여동생 생각이 나기도 했다.' 고

이 강간범들은 즉각 군법회의에 돌려 져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당시 군법에서 중형을 받으면 일본 본토의 육군 형무소로 이송, 복역하게 되어 있어서 결국 본국으로 압송되어 수감됐다.

그 후 이들 원 부대는 버마에서 전멸되고 이들은 살아 남았다.

패전과 동시에 육군 형무소도 폐쇄되고 이들도 사면되어 사회로 나왔다.

강간범은 살고 그렇지 않았던 놈들은 죽고... 이것이 인생이다.




개주검 이야기



태평야 개전전 일본과 미국이 마지막 협상을 할 때 워싱턴에는 일본 대사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노무라 기찌사부로 대사(퇴역 해군대장출신).

또 하나는 노무라 대사를 돕기위해 특별히 추가로 파견된 구루스 사부로 특명전권대사.

구루스는 직업 외교가출신으로 부인은 파란 눈의 미국인이었다. 슬하엔 아들도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구루스대사 가족은 교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구루스의 아들(혼혈아)도 국적이 일본이므로 육군에 입대, 전투기 조종사가되어 본토 방공전에 출격했다.

구루스중위는 내습하는 미군기를 요격중 피탄,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죽창, 일본도를 들고 몰려 온 주민들은 구루스중위의 외모를 보고 미군으로 착각, 불문곡직,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당시 미국의 무차별폭격에 수 많은 민간인들이 죽자 미군 조종사들에대한 증오가 하늘을 찌를듯했다)

어이없는 개죽음, 구루스대사 부처는 망연자실, 비탄에 빠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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