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방 없고 정치글일수 있는 거 양해바라며)

 

 

9회를 다시 보면서

남는 단 하나의 대사가 있다면

연산의 '깃발'이었다.

사람이 과연 깃발로 살 수 있겠는가던,

하지만 아들에게 이미 깃발이 된 아버지도 있다.

바로 아모개다.

비록 제한된 공동체에 머물렀지만

아모개가 꿈꾸었던 세상은

이제 그 염주를 통해

아들의 이상향이 된다.

연산의 아버지와 길동의 아버지.

'깃발'은 그런 두 아버지를 아우른다.

동시에 두 아들을 비춘다.

우리는 앞으로 아모개가 처음에 들었던 깃발이

아들을 통해 어떻게 펄럭이는 지를 보게될 것이다.

다른 아들이 냉소한 아버지의 깃발로서의 삶은

그 세계를 허무는 카오스와 피바람을 가져올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과연 그다지도 회상장면이 과잉인 걸까,

그저 설명한다기보다

이 드라마의 플래시백은

현재의 심리상태를 극대화하여 보이기위해 사용왼다.

수학이의 공부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그때의 길현의 마음과

아모개가 염주를 손에서 놓지않으며 염원하고 기도하던 무엇.

아버지가 외친 천대받던 자들의 철옹성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과연 길동이는 두렵게만 보았었을까,

멈자치가 회상하던 그 익화리 잔칫날 군중속의 자신은

이제 돌아갈수 없게 되어버린 상실과 스스로의 회한이다.

연산이 되돌아보는 아버지의 유언은

감히 받아들일수 없는 어리석은 미몸이었을것 같다. 

더구나 그 냉소하게하는 사대부들의 군자경쟁과 임금길들이기를 보면서

그런 그가 차라리 정직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음률에 천착한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노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비파와 해금,가야금의 소리는 스스로를 꾸미지도 않는다.

 

길동이는 허태학이를 잡아 충원군에게 덫을 놓으리라는 계획을

이제 거의 실행에 옮겼다.

그 과정에서 가령이를 품에 가볍게 안던 장면은

퓨전사극다운 로맨스였고,

'이제 내 오라버니 해주는 거지?'하던 가령이는 씹덕을 부른다.

길동이와 성님들의 장면에선 자연스런 해학과 웃음도 묻어나고

결국 허태학을 굴복시키는 길동의 심리전과 감화도 볼만했다.

의외로 참 한결같은 모리의 충성심도 눈을 잡아끌고,

길현이는 수학이를 만나게 되며 서스펜스를 깔고간다.

'어디 그것이 제 마음대로만 된답니까?

전하의 마음에 달린 거지요?'

이제 교태로움까지 자연스레 뿜어내는 공화의 대사는

자신감으로도 읽히며

또 인연과 운명의 불가해함으로도 들린다.

덕분에 신세망쳤다고하는 그 길동이를 만나는 것은 어디 예상할 일이던가 말이다.

 

 

 

길현이 그 우연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만나다.

그것이 심지어 제가 죽게될 길이라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을 유혹.

 

 

 

 

 

 

 

 

마치 꿈만 같던 서원(사립고등교육기관.공립인 향교와 구분됨.)안을 거닐더니

그대는 누구냐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술술 거짓말을 해버리던 길현이.

그러고 보면 훗날 씨종 아모개의 아들을 자처하던 동생과 대조되는 선택.

 

그런데 왜 31세손이라고 했을까,

그 어르신이 그렇다면

32세손 쯤으로 둘러대야 그럴듯하지 않았을지,

뒤늦게 양자를 들였다거나 그런 식으로 풀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설마 다음 이야기에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좀 불안하던

은인(?)송도환과의 예고편의 대화.

 

수학이의 중광시를 주제로 한

박씨부인과 충원군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그 주제에도 냉소할줄 알던 허태학.

이후 모리를 자신보다 더 가까이하려 하는 충원군에게 반감을 느끼면서

엔딩의 배신이 가능해진다.

 

 

 

참으로 질긴 말.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차마 역적으로는 살 수 없어 떠나가는 이들.

그를 지켜보는 아모개의 어두운 얼굴.

 

 

 

"건달을 건드린 놈들한테 그대로 갚아줘야지요.

건달한텐 그게 신용이니까.'

 

길동이는 벅차는 꿈을 품고 말하지만

용개와 세걸의 두려움을 막지는 못한다.

충원군을 대낮에 백성들 앞에서 단죄하겠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세상을 뒤집어 엎겠다는 말이니

이탈자가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못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떠나려던 사람도 남을 마음을 먹은 이도-

사실상 '역적의 시작'인 셈이다.

 

'그럼 네는 와 도망치는데.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큰 어르신. 내래 내래 그릇이 이거밖에 아니 되오.'

 

떠나가는 이들을 들으며

가장 맘이 아픈 사람은 큰어르신 아모개였을 법하다.

그렇게 그는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말이다.

제손을 잡은 이들의 지붕이 되어주겠다 했으나

충원군의 기침 한번에 그 성채는 무너져 버렸다.

 

 

 

 

 

 

 

 

'근데 길동오라버니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거 있죠?

그럼 그걸 여자가 하지 누가 해요?

살다살다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니까요.

암튼 제가 부엌에 들어가는 걸 하도 싫어해서

얼릉 일어나서 밥이랑 빨래랑 다 해버렸어요.

내가 이런 거라도 안하면 필요없다고 바로 쫓아낼 거면서

누가 모를줄 알고?'

 

이 대사에 담긴 두개의 심리

남존여비. 남녀유별의 시대에 태어나서

마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 삶과 의식에 베여버린 생각의 반발이며

여기서 쫓겨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아내를 살뜰히도 챙기던 아모개의 아들 길동이라서

씨종으로 살아본 영혼이라서

오히려 가능할수 있는 그 진보적인 가치관.

이미 가령이가 길동오라버니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충분히 보인다.

 

참 수다스럽지만

그래서 더 안쓰럽기도 이쁘기도 한 이 캐릭터.

마치 결국 드문 미소를 보이고 마는 아모개의 마음으로,

 

그리고 쫓겨나던 엄사또의 뒤엔

길동이의 빅픽쳐가 있었다.

길현이와 어리니,업산이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며

어르신은 저리 망가졌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

'난 그래도 네놈들하고 놀때가 제일 신나고 좋았어.

다들 미안했네. 내가 죽일 놈이야. 나도 알아.'

그렇게 꽃피던 낙원은 폐허가 되었지만

꿈을 놓지 않으면

그 위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필 것이다.

 

 

 

 

 

 

 

 

 

 

 

5회에 등장했던 끝쇠와의 팔씨름이 다시 나온다.

예상대로 정말 끝쇠는 져준것이었고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누이를 지키기 위해 각성한 이후

길동이는 기억은 잠시 잃었어도

그 스스로의 금기는 풀어놓았던 것이다.

'애기장수로 난 자'라는 제 정체성은,

 

아모개는 그런 아들을 보며

그토록 염원하던 모습에 행복하기만 했을까,

'아부지허고 씨름 한 판 더 혀.

왜 힘을 못 써.'

하긴 자신은 실패했으나

길동이라면 기어이 지켜낼수 있으리라 생각했을만 하다.

 

군밤 먹느라 열심히면서도 잠시도 입을 쉬지않는 가령이는

아저씨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허태학을 토끼몰이할 게획이 서서히 진행된다.

그 와중의 웃음.

삽질의 제왕 끝쇠성님.

 

제게 은근한 마음을 드러내는 중인 충원군 앞에서도

모리는 아버지를 변호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염주를 되찾아오기로 마음먹은 길동.

가령이가 겁도 없이 나선다.

아마도 그녀는 무어라도 여기 한몫으로 남아있을

그런 공을 세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안돼.돌아가. 다른 애들처럼 집에라도 가서...'

'나 돌아갈 집이 없어.'

'잘못 되서 네가 죽어도 난 상관안 할꺼야.'

하지만 길동은 기다리는 동안 노심초사한다.

 

길동이에게 그리도 소중하고 행복하기도 했던 '집'이

가령이에게는 없단다.

 

 

 

 

 

 

 

 

 

아래 길현이가 책보는 장면은

그저 비쥬얼 때문에 캡쳐해버린.

열린 사립문 바깥으로 기와지붕과 고목이 저절로 그림을 만든다.

 

 

 

 

 

 

 

 

 

 

인수대비가 소망하던 성종을 위한 수륙재(불교적 제의행사)로 인해

신하들과 대립하게 되는 연산.

'수륙재를 행하심은 큰불효인줄 아뢰오.'

'불효라니.어찌 그런 독한 말로 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과인이 이제 처음 나라의 일을 이어받고 두려운 마음이 가득한데...'

 

연산이 말은 참 여리게 하나

그 말을 꺼내기까지 숨을 고르는 과정은

안에서 천둥과 폭풍우가 치는듯 하다.

그 대조가 인상적이기도 했던 대화장면.

 

유자광,노사신,윤필상 등의 실존인물이 등장한다.

마음에 안드는 언행을 빌미삼아 소인딱지를 붙이는 모습이 가관이다.

관심법이 따로 없다 싶다.

물론 그들 스스로야 경전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간언을 두려워않는 것이라 자부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2000년 전에 살았던 공자와 맹자를 아직도 두려워한다.

그러니 그들 앞에서 가장 꼭대기의 깃발이 되어야 한다.'

성종은 유언으로 그런 당부를 남겼다.

하지만 이미 보건대 아들의 눈에 그는 가소로울 뿐이다.

좀 멀게 들릴지 모르나 그 소인딱지에서 메카시즘을 볼수도 있갰다.

 

마치 연산의 마음처럼

(물론 임금의 마음에 들어 팔자를 고치려는 온갖 욕심들이야 있었겠지만)

월하매를 비롯한 장악원의 기녀들의 옥음이야말로

마음속 잡념을 날려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상전영감과 공화의 대화

 

 

 

 

 

 

 

 

 

"그것이 어디 제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요?'

"뭐?'

'전하의 마음이지요.

제 욕심도 상전의 의지도 다 전하께 달린것 아닙니까?'

 

적어도 제눈으로 그 세속의 인연을 확인한 기녀에게

전하를 알현할 기회를 허락할 수 없다는 상전의 태도를

단 한마디로 무력화시키던 공화의 멋들어진 대답.

 

그렇다.

결국 임금의 의지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세상이다.

그 임금의 의지가

너무도 무력하게 시험받고 조롱당한다

연산이야 여겼겠으나

그래도 그 의지가 법이던 시절이기도 하다.

 

또한

거기 담긴 인연과 운명의 오묘함에 대한 은유도,

지금 임금에게로 나아갈 제길을 막고선

길동이와의 인연인들

이전에 짐작조차 했겠는가,

 

이 장면의 공화는

훗날의 장녹수답게

세상을 뒤흔든 치맛폭의 주인이랄만하게

교태롭고 자신감이 넘쳤다.

 

 

미션을 수행중인 가령이의

능청스런 임기웅변과

하필 손목에 하고있던 염주로 인한 위기감.

그리고 마무리는 심쿵이다.

과연 길동이도 그때 좀 설레였던걸까,

하긴 그 눈빛과 품에 안은 손의 클로즈업,심장소리는 분명 의도한 듯 했다.

대단한 격정까지는 아니라 해도,

바람직하게 바뀌어주던 음악을 들으며 역시 음감느님답다 했다.

'이제 내 오라버니 하는거야.' 그리고 그 미소.

거기 마주 웃어줄줄 아는 길동이에도

내가 웃음이 나던,

 

 

 

 

 

 

 

 

 

 

아버지의 상징같던 염주를 기어이 찾아와

아들이 쥐며 살아간다.

그 마음을 헤아리면서,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그를 보며 감격했을 아모개

그렇게 면면히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한때 아들은 아버지가 그 사업과 욕심을 내려놓기를 바랬다.

그리고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니어라 면서 아이처럼 울었다.

하지만 아모개가 본다.

지난날의 자신을 닮아가는 아들의 든든한 모습을.

그가 어쩌면 대신 꾸었던 애기장수의 삶을

그 운명을 타고난 아들이

이제 기어이 두손에 받아들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온통 감당해온

미친 세상을 살아내는 짐을

아들이 이어받는다.

 

그리고 이제 망가지고 지친 아비의 잠자리를

아들이 살뜰히 챙긴다.

물론 아버지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마음으로나마 그 시작된 아들의 머나먼 길을 배웅한다.

 

바로 이런 내면과 감정선에 의외로 집중하는 이야기라서

회상장면이 그다지도 많은 것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큰그림만을 바라는 시청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을수 있겠으나

나는 이런 이 작가의 화법이 좋다.

아마도 그런 개성은 작품을 관통할 것이다.

차라리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아침 먹기 전에 돌아와야 돼.

밥 일곱그릇 퍼놀꺼야."

가령이가 제일 치이던 장면.

길동이의 발걸음도 잠시 흔들린다.

채수빈도 참 대사를 잘 살린다. 이하늬만이 아니라,

 

그 와중에

'사또는 집이나 잘 지키시오.' 하던 끝쇠 때문에

픽 웃게 되던,

 

 

 

 

 

'못 들어옵니다. 염려 마십시오.'

누군가는 이런 모리의 듬직함에 악역임에도 심장어택을 당한대도

이상치 않다.

 

 

 

 

 

 

업산이가 좀 귀신같은 타이밍에 돌아왔다.

우연에 어 하면서도 그래도 반갑던,

너무 튀지않게 앞뒤설명은 뒤에 덧붙일 것같다. 소문을 듣고 기다렸을지도,

 

"왕년에 개경건달 소부리 하믄 다들 벌벌 떨고 그랬는데 말이디. 어"

"그러게 말입니다. 월정사 일청 주먹질 한방이면 부처님도 눈을 번쩍 뜨셨는데 말입니다."

"와 다 죽어갑니까, 내가 다 해본다 아입미까,;

'그럼 한 번 해보지 뭐.'

'업산이가 왔소!'

 

그 와중에도 이 성님들의 만담은 끝없이 이어진다.

'김과장'의 아재개그와는 또 다른 맛,

 

허태학이 몰랐던 아모개의 아들 길동이

이제 허태학에게 인사를 한다.

아비를 대신하여,

 

 

 

 

 

 

 

"사람이 깃발로 살수가 있겠느냐?'

대사빨이란 이런것,

그리고 두개의 깃발.

성종과 아모개.연산과 길동,

 

 

"아바마마께선 열세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깃발이 되셨다.

사람이 깃발로 살 수 있겠느냐?

사람이 깃발이 될 수 있겠느냐?'

 

"세자. 조선은 공자와 맹자의 나라이니라.

그러니 세자

공맹의 말씀을 심장에 새겨

그들이 가는 길로만 가라.

그길이 안전하다.

아니 오직 그길만이 안전하다.

 

공맹의 뜻에 어긋난 자를 보거든

세자가 가장 먼저 손가락질 하며 비웃거라.

누구보다 먼저 소인이다 외치며 핏대를 세우거라.

그리하여 공맹의 뜻을 따르는 자들중에

가장 높은 깃발이 되거라.'

 

글이 길어지는 걸 알면서도

대사가 워낙 근사해

받아적고만 있다.

내내 그랬다.

 

'아비라고 공자와 맹자를 의심한 적이 없었겠느냐?'

성종은 아들에게 그리 말한다.

(옳아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안전하기에

공맹을 모시는 신하들과 척져서는 안되며

차라리 그 선두에 서라고 충고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저것이 위대한 군왕의 삶이라고 살수 있는가,

황진영작가가 해석한 어느 조선의 군주에 대한 시선이

비판받을 수도 있을지는 모르나,

나 역시 역사에 한없는 문외한이지만

그럴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조선을 만들었다 할수도 있는

삼봉 정도전은 사대부의 나라를 꿈꾸었다.

계승되는 왕정의 불완전함을 그런 시스템으로 보완하여

결국 백성들이 좀더 살만한 제국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임금은 한없이 위축되어야만 하기도 했다.

태종이나 세조처럼 왕권으로 자신의 나라를 열어간 이들도 있었고

그 신하들조차 감동시킨 문치를 보여준 세종 같은 이들도 그전에 있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산은 그래서

그 허수아비 깃발에 불과한 임금이란 자리 앞에서

번뇌하고 끓어오르고 있다.

그의 가족의 비극은 그런 내면의 시원이기도 하다.

 

역시 어머니이자 아내를 잃었던

길동의 가족의 비극이

아모개와 길동을 강하게 만든 것과는 대조적이기도 한,

 

가장 귀한 자가 감내해야 했던 한계와

가장 천한 자들이 갇혀살아야 했던 감옥.

 

 

 

 

 

 

 

 

 

 

 

 

 

 

 

 

"오늘은 고이 보내드리겠습니다.

허행수가 불쌍해서가 아니오.

맘만 먹으면 허행수를 이곳으로 다시 불러올수 있기 때문입니다.

못 믿으시겠습니까,

그럼 가서 한번 꽁꽁 숨어보시오.

(중략)

그러니 복을 비시오.

독사에 물려 급사하지 않을 복

구덩이에 빠져 급사하지 않을 복

독이든 음식을 먹고 횡사하지 않을 복

무엇보다 평생토록 큰어르신들의 사람들 눈에 털끝 하나 띄지않을 복

-이 대사의 리듬감과 말맛도 멋지오.-

(중략)

평생 그리 사시겠소?

하지만 큰어르신은 충원군과 다릅니다.

큰어르신의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을 개로 보지 않소.

큰어르신의 사람들은 절대 형제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또한 큰어르신의 사람들은 반드시 당한만큼 갚아주는 자들이오.

허행수가 큰어르신의 사람이 된다면

허행수를 멸시한 자들이 누구든

큰어르신의 시람들이 찾아가 갚아줄 것이오.

 

자 선택하시오.

 

충원군의 개로 살겠소,

큰어르신의 형제가 되시겠소."

 

 

길동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대신

아버지 아모개 '큰어르신'의 사람들이란 표현을 쓴다.

자신 역시 그 무리의 일원으로 부르는 것이다.

 

작지않은 무리의 두목으로 살고있으나

마치 졸개같은(사대부들의 표현을 빌면 '소인'같다는 말이 딱인)

허태학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그런 못난 제인생의 끄트머리에서

과연 복음처럼 길동의 말을 받아들였을까,

그 진심은 두고보아야 할 듯 하다.

하지만 이미 참 그럴듯하던 대사.

 

한 아들은 아버지의 세상을 도저히 이어받을수 없고

다른 아들은 한번 무너진 그 아비의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9회 엔딩의 정중동의 쾌감이기도 하다.

8회의 그것과도 유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