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에 자주 찾는 카페가 있다. 카페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해서 굳이 읽을거리를 가져가지 않아도 재미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카페 주인이 책을 아주 좋아해서 최근에 나온 좋은 책들도 많이 갖다 놓는다. 책 고르기의 피곤함을 알기에 내게는 아주 알찬 장소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찾은 카페.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가게 주인이 남녀 네 명과 앉아 작당모의(?)를 하고 있다.
“자리에 앉아계신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유도할 겁니다.”
“꼭 이 넓은 테이블에 앉아야 해요. 그리고 여자 분이 벽 쪽에, 남자분이 창가 쪽으로. 저희는 여기 저기 흩어져 앉을 거고, 연기 팀은 저 쪽에…”
뭘 하는가 싶어 주인에게 물어봤다.
“프로포즈 작전 구상중이에요. 이따가 3시부터 여기에서 프로포즈 이벤트를 할 건데, 한 편의 연극이 펼쳐질 겁니다.”
평소 읽고 싶던 책 두어 권을 책장에서 뽑아 늘 앉는 자리로 간다. 책에 빠져 얼마가 흘렀을까.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요즘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는 사람들이 어딨어? 어? 나는 몰디브 가고싶단 말이야! 이럴 거면 다른 여자랑 결혼해!”
여자가 카페 문을 열고 휙 나가버린다. 남자는 부랴부랴 여자를 쫓아가고, 카페에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는 침묵만 흐른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한쪽 벽에 영상이 흘러나온다.
남자가 준비한 프로포즈 영상은 두 남녀의 추억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인들의 축하메시지. 이 영상의 감동을 극대화시키려고 결혼을 앞두고 싸우는 커플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영상이 끝나자 화장실에 간다며 잠시 나가있던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들어온다.

김동률의 <아이처럼>
~ 또 하루 종일 그대의 생각에 난 맘 졸여요 ~
~ 너무 좋아서 너무 벅차서 눈을 뜨면 다 사라질까봐 잠 못 들어요 ~
~ 내게 와줘서 꿈꾸게 해줘서 ‘우리’라는 선물을 준 그대 나 사랑해요 ~

여자가 운다. 그런데 남자도 운다. 남자의 눈물 젖은 노래는 카페에 흐르던 ‘오글거림’을 ‘감동’으로 바꾸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노래가 끝나고,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의 말을 건넨다.
“우리 정말 오래 사귀었잖아.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처럼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부족한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줘. 사랑해. 나랑 결혼해 줘.”
장미꽃 한 다발이 그녀에게 간다. 그리고 여기저기 앉아있던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장미꽃 한 송이씩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의 눈물 속에 행복이 보인다. 그리고 남자가 장미꽃과 함께 준비한 또 하나의 선물. 위스키다.
“이 위스키를 처음 본 순간, 프로포즈를 위해 사야겠다고 생각했어. 위스키를 좋아하는 너와 나에게 꼭 맞는 위스키란 생각이 들었거든.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그림이야.
유명한 저 그림의 제목은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 어느 날 나우시카의 꿈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날이 밝으면 시녀들과 함께 해변에서 밀린 빨래를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따라 해변에서 빨래를 마치고 잠시 공놀이를 하며 놀던 나우시카 앞에 왠 반라의 남자가 나타나 도움을 청했다. 바로 오디세우스다.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 지중해를 표류하며 온갖 고난을 겪던 중이었다. 그의 딱한 처지를 들은 나우시카는 그를 아버지의 궁전으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한 후 고향에 갈 수 있도록 배를 내줬다. 이 배를 타고 고향인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장장 20년에 걸친 모험을 끝낼 수 있었다.
“넌 나만의 나우시카야.”
특별한 위스키 한 병이 더 특별한 프로포즈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저 독립병입 위스키를 만든 회사는 이런 순간을 상상해봤을지 궁금하다.

“프로포즈를 축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의 의미로 제가 한 잔씩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