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의 로맨스

암울한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반가우면서도 착잡했다.
너무 암울하고 아파서 들여다 보기조차 싫은 시대,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자유연애, 신여성, 모던보이가 등장하고,
세계적으로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침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으나 낭만주의가 무르익던 시대,
분명 암울했으나 아름다운 것들도 공존했던 이 시대를,
로맨스가 특기인 작가가 어떤 식으로 그려낼지 걱정스러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분명 그 시대의 사람들도 사랑을 하고 낭만을 즐겼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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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3화에 나왔던 애신의 이 대사가 이 드라마의 많은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지러운 이 시대에
글의 힘을 믿지 않는 애신은 총을 들고 나라를 구하는 길을 택한다.
그런 그녀가 총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것보다 더 위험하고 그것보다 더 뜨거운 러브를 한다.
조선인처럼 보이는 이방인과,
조선에 있을 때는 노비였던 자와,
조선의 침략군과 말이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러브는 그만큼 위험하다.

총구를 택한 여인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마저도 낮엔 사대부 애기씨로 살아야 하기에 정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수도 없다.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했던 시기도 아니기에 소식을 모른채 몇날며칠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하며
어지러운 나라 사정 때문에 정인을 총으로 겨눠야 하는 상황에도 놓인다.
그리고 툭하면 연락이 두절되고 헤어진다.
참 답답하고 저들은 도대체 언제 제대로된 러브를 하나 싶다. 그 흔한 키스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가 너무 의병 이야기인것을 의식하여 스킨십을 아끼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 때 같이 열렬히 시청하던 지인이 나에게 얘기했다.

“그게 저 시대의 로맨스가 아닐까”

사랑에는 많은 장애물이 따른다.
현대로 치자면 시간, 돈, 부모의 반대, 배경, 지위 등
그런 장애물이 그 시대에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역적, 신분, 대의, 명예 등일 것이다.
어떤 장애물이 더 크고 위험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시대의 장애물을 넘고 그들은 러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장애물이 현대의 우리가 보기엔 너무 크고 답답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아는 러브의 모습이 아닌 다른 러브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이런 답답함을 느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니다.
유진과 애신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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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를 걸어놓고,
테라스에 오래서서 기다리고,
6개월을 연락을 못받은 채 하염없이 또 기다리고,
눈앞에 나타나진 못해도 정인의 소중한 물건을 호텔방을 뒤져서라도 훔쳐 가져가고,
“그대와 함께 있고 싶소” 라고 말할 수 없어
“나는 이제 귀하와 더 이상 나란히 걸을 수가 없소”라고 텅빈 눈빛으로 말하는,
그런 그녀에게
“그대와 사랑하고 싶소”라고 말할 수 없어
“그대가 가는 방향으로 내가 걷겠소” 라고 말하는 그들은 그 시대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사랑해”라고 말하면 될 간단한 일을
그들은 저렇게 러브를 말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아비는 매를 맞아 죽고 어미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고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는 죽을 고생을 겪고 살아남아 이방인이 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사대부 애기씨는 하늘 같던 할아버지를 잃고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며 나라는 점점 외세의 손에 넘어가는 그 상황을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아픔을, 그 무너져 내림을.
역사를 살아온 이름모를 그 많은 누군가들이 살아왔을 삶이고 겪었을 아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그들의 위험하고 뜨거운 마음 앞에서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은 너무나 우습고 하찮게 보이는 것이다.

오늘 회차를 보고 유독 유진과 애신의 대사가 마치 짝을 지은 것처럼 마음을 울린다.

“같이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16화 애신의 대사)
“나도 내가 살려고 이러는 거요” (20화 유진의 대사)

사람을 살리는 것, 살아가게 하는 건 결국 사랑.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러브스토리의 소재가 고갈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이런 이유가 아닐까.
유진과 애신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그 암울했던 시대에도 사람들을 살리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작가는 “쓸쓸하고 장엄한 모던 연애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아직 회차가 남았기에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너무 쓸쓸하고 장엄한 끝은 아니었으면 한다.
모든 끝맺음은 나름의 슬픔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해피엔딩은 아닐지라도
실낱같은 희망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샤이닝 엔딩은 되었으면 한다.

사랑을 말하기조차 사치였던 마음 아픈 이 시대를 굳이 꺼내 낭만을 이야기했던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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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데려가라고 유진이한테 찾아온 애신이의 심리를 이해해보려 하다가 여기까지 진지돋게 쓰게 되었어. 그렇게라도 정인을 살리고, 마지막으로 정인과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이라고 믿고 싶어.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현생불가다. 새벽갬성 터져서 쓴 이 글은 삭제할수도.. 긴글 읽어줘 고마워. (짤은 갤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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