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제 아버지께서는 학원을 하셨습니다. 그 시절 학원이 으레 그렇듯 복도에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책장 하나가 놓여있었고, 그 속에는 70년대와 80년대의 종이내음이 가득 풍겨오는 고전명작들로 꽉 들어차있었죠. 만화라고는 부모님이 사주신 학습만화, 무협이나 판타지라고는 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의 저는 심심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고전명작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전명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고리타분할거라는 생각을 하시는데, 제가 읽은 고전명작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밀림의 왕자 타잔, 해저 2만리, 셜록 홈즈, 투명인간, 동굴의 여왕... 여기서 언급된 책들 이외에도 꽤 많은 작품들을 읽었는데, 그 중 동굴의 여왕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작가와 번역자의 유려한 글솜씨와 간간히 붙어있는 일러스트가 어린 시절의 제게 흥미를 유발했고, 그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계속 되새김질하듯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젠틀맨 리그는 그 당시 고전문학들, 그러니까 19세기~20세기 장르문학을 향유한 작가와 캐릭터들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사실 이런 작품을 기대하고 책을 집었던 것은 아닌데, 추억의 인물들로 가득 채워진 그림과 사건들이 당시의 향수를 고스란히 불러일으켰습니다.
젠틀맨 리그의 인물들은 브이 포 벤데타와 왓치맨 쓴 앨런 무어 아니랄까봐 상당히 퇴폐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근데 이건 앨런 무어라서 퇴폐적으로 그려진 게 아니라 당시 작품들에서도 그렇게 그려졌던 인물들입니다. 원작에서 투명인간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당이었고, 네모 선장은 말 그대로 배에 올라탄 미친 놈이었죠. 어쩌면 앨런 무어는 그 당시 인물들의 성향에 자신과의 굉장한 동질감을 느끼고 이런 작품을 기획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크로스오버에 가깝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19세기~20세기 시절의 고전문학 캐릭터들이 총출동해서 펼쳐지는 이야기인지라 그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곱씹어볼만한 인물과 언급이 즐비합니다. 게다가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그림에서는 스팀펑크 판타지의 독특한 매력이 독자의 눈길을 잡아끌게 하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크툴루 신화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인데 과거에도 크툴루 신화 그래픽노블을 만들었던 앨런 무어라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나 타임머신과 결부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게 재밌었어요. 크툴루 신화에도 일종의 타임머신 역할을 하는 실버 키가 있잖아요? 거기에 실버 키의 주인인 랜돌프 카터와 소설 타임머신의 주인공이 만나는 이야기라니... 팬픽에서나 구현되는 상상이 여기서 실현된다는 점은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에겐 정말이지 매력적이죠.
젠틀맨 리그는 앨런 무어가 서술하는 현란한 서사시이자, 그 시절 문학을 읽던 사람들이 꿈꾸던 거대한 크로스오버입니다. 퇴폐적이지만 매력적이고, 난폭하지만 기묘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문학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이만한 선물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밌고, 기묘하고, 향수가 묻어있죠. 고전문학판 헬보이를 읽는 느낌이랄까요? 어쨌든, 당신이 셜록 홈즈의 팬이라면, 해저 2만리를 읽느라 식사도 거르던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잘읽었습니다. 아직 사놓고 보진 않고 있는데 얼렁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멋모르고 사서 봤다가 당황했는데 디즘님 리뷰 보고 이해. 좀 더 알아보고 샀어야 하는 작품이었음. 개인적으로 취향은 아니였지만 충분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함.
잘썼네요^^
2권 나왔나
1,2권 나오자마자 바로바로 사서 봤었는데, 진짜 18,9세기 외국문학 챙겨보던 전 진짜 재밌게 봤음. 부록도 제법 호화스럽고...
불만은 2권 권말소설이 너무 주석 주렁주렁 달려있는거...
올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