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성채, 유혹의 시작>

 

 


그 성채 안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밤새워 의정생활을 하던 열정적인 국회의원,
서민들의 달동네에 들어가 타인의 삶을 염려하던 인본주의자 언론인,
가족을 등지고라도 사랑을 선택했던 소년,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서로의 약점을 틀어주고 마음을 이용하며 협박하고 의심하는
인간관계의 가장 비정한 숲을 걷고 있다.
그 성채 안에만 들어가면 모두들 가장 우아한 옷을 입는 대신에 가면을 쓰고,
재물을 얻는 대신 사람의 마음을 잃는다.

 

 

시한부의 강석현, 유혹을 선택하다

 

이 드라마의 수많은 이들이 뒤쫓고 있는 비자금이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출처를 밝히지 않고 써도 될 돈이 그렇게 쌓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에 피를 묻힌 걸까?
그렇지만 정작 이 사연많은 자금의 주인인 강석현은 시치미를 뚝 떼며
자신의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밤새워 격무에 시달리며 사랑하는 사람이 해준 소박한 비빔밥을 먹던 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는 생리를 꿰뚫고 철저히 이용해 오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감상주의자가 되었을까.
모두에게 이용만 당하는 은수를 연민하는 것이든
혹은 청미에게 못다 갚은 죄책감의 대체물로 생각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강석현은 은수 그 자체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자신을 돌려받고 싶은 것인 지 모른다.
진정기 의원의 무고가 그토록 억울했다면 집요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청미에게 그토록 미안했다면 일주에게도 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강석현은 미안한 척 해왔을 뿐 어쩌면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그 어정쩡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측은해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더이상 바꿔볼 수 있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을 서성거리거나 비빔밥을 먹으며 약간은 멍청해진 자신을 조금은 맘에 들어한다.
현명하게 바람이 부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던 이성적인 정치가 강석현은
어차피 시들거라면 화려하게 한 때를 풍미하는 꽃이길 꿈꾼다.
건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몸에 탈이 날 것이고 생명은 위태해질 것이다.
순진하게 마음 따위 들키면 이용당하게 마련이다.

평생을 쌓아온 정치인으로서의 명성, 대통령 가문을 만들려는 야심도 꺾일 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을 예감해도 아마 강석현은 멈추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은수 앞에서 그는 마음이 아리기도 하고, 따뜻해지고 뭔가 베풀 줄 아는 따뜻한 심장이 된다.

청미에게 다정하게 웃어줄 수 있었던 그 강석현을 잠시라도 되찾기 위해 그는 자진해서 유혹에 매혹되고 있다.

 

 

성채의 담장을 넘어 꾸이 나무 아래로

 

형우 모자는 복수를 꿈꾸며 그 성채 안에 들어갔지만
점차 그 성채 안의 게임의 룰에 길들여졌다.
형우는 15년 동안 복수라는 하나의 단어에 자신의 성정과 정 반대로 살아야 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매순간 배신하고,

매순간 거짓으로 사랑했다.
형우는 과연 비자금을 까발리는 것으로 정말 모든 걸 끝낼 수 있었을까?
이미 자기 자신이 성채 안의 인간과 아주 닮아버렸을 그 순간 말에 말이다.
15년 전에 소년 형우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동등하게 사랑하려면 편견에 가득찬 집을 떠나는 게 답이었다.

어쩌면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동안

그는 정직한 미소를 잃었고, 거짓과 가면은 일상이 되었다. 
그때 은수가 성 밖에서 들어왔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성채를 떠나서 행복해지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복수의 코 앞에 두고서도 그닥 웃지 않던 형우가

비로소 밝게 웃고 아주 구체적인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성채 밖에서 기꺼이 손 내밀어준 은수와 함께 둘이 탈출하려는 순간, 다시 붙든 성채의 덫.
형우는 은수를 통해 복수를 위해 질주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지켜봐야 할 참이다.

그러나 이제 형우에게도 목표가 생겼다.

강석현이 보상받고 싶은 자신이 있는 것처럼

형우도 잃어버린 15년의 복수보다 소중한, 돌아가야 할 추억의 고향과 꾸이나무의 서정이 있다.

그걸 놓지 않고 지켜내야 그는 성채에서 살아남고

성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탈출로도 잃지 않을 것이다.

 

 

더이상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여자도 되지 않을 거야

 

이 드라마에서 은수만큼 억울한 삶이 있을까?

철없는 나이에 가족과 친구의 눈치를 보며 마음도 참았었다. 억울하게 납치를 당했는데 오히려 손가락질만 돌아왔다.
남편의 사인도 밝히지 못한 채 전과자가 됐고, 난데 없는 전화기의 협박에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은수는 이때까지도 마음을 잃지 않았다.
친구가 다칠 마음을 진심으로 염려했고, 배후를 찾아내서 맞설 생각도 하지 않고,
심지어 모든 사건의 배후로 의심되는 강석현에게도 일말의 연민을 느끼곤 했다.
어쩌면 그렇게 유순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했고,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 비밀은 은수에게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딸이자 은수 그녀의 진짜 미래. 자신의 억울함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았고,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맑게 웃고 지치지않고 삶을 지켜내려 했다.

협박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그 곳에서 어쩌면 간혹 그저 다 놓고 싶을 만도 한데,

답답해 보였어도 그녀는 늘 살아남는 법을, 자신이 지킬 수 있는 뭔가를 지켜내려 정신을 똑바로 추스리곤 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없어졌다. 
은수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일주 앞에서 '가짜로' 웃으며 연기했다.

목적이 분명한 화려한 옷을 전시하듯 입고 기꺼이 유혹의 팔짱을 꼈다.
은수는 복수의 상대를 찾아내서 죗값을 치르게 하려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아니다.
배신자의 딸, 횡령범의 아내. 그렇게 가족을 하나하나 잃어가면서 무엇하나 하지 못한 자신을,
행복을 꿈꿨던 자신을 배신자라고 낙인찍고 벌주려는 중이다.
그렇기에 은수는 형우의 손을 잡을 수가 없다.

형우는 은수의 민낯이고, 여자로서의 설렘이고, 꾸이나무의 따뜻함이고 바로 은수의 행복이다.
자신을 벌주기 위해, 가면을 쓰고 견디기 위해 그녀는 형우의 손을 놓고 성채로 들어간다.


성채 밖에 미래가 있다.

 

강석현은 이번만큼은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가려 하고,
진형우는 이번만큼은 꾸이나무 아래의 따뜻한 내일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은수는 이번만큼은 가족의 억울함을 밝히고 스스로 지켜내려고 한다.
그렇지만 은수와 형우는 억지로 포획되어 성채에 발목을 잡힌 것이고,

성채 안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은밀한 감정마저 장기판의 말처럼 이용하려는 음모가들이 판을 친다.
결국은 그 누군가를 밝혀내고 맞서지 않으면 결국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이 누구이든 서로 얽히고 얽힌 이 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서로를 잃을 것이다.
복잡하게 뒤틀린 판세 속에서, 과연 비빔밥의 소박함과 꾸이나무의 따뜻함을 지켜낼 수 있을까?

다행히 미래는 아직 죽지 않았따.

미래는 여전히 가는 숨을 유지하며 생명줄을 쥐고 있다.
바로 그곳이 그들이 돌아와야 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은수의 딸) 미래는 은수에게도, 이 드라마 안에서도 유일한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