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또 긴 후기를 가져왔어. 이번엔 더 길....... 적당히 패스하면서 읽어줘.

국립극단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외계인들> 후기야. 난 개인적으로 넘 좋았어서, 연덕이라면 내리기 전에 봤으면 좋겠다. 영업을 꿈꾸며 후기를 씁니다.

댓글 주는 횽들 항상 고마워^^



연극 <외계인들> 후기

극단 아어

출연: 최순진/박용우/안지환



연극 <외계인들>, 외계인이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는 방법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떨어져, 지구인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외계인들에게는 그들의 행성에서 소통하는, 고유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지구인의 삶의 방식은 -소통하는 방법,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서로에게 기대는 방법 등등- 복잡미묘한 것이다. 다른 이에게는 그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그들에게는 끝을 알 수 없이 늘어놓은 수학방정식처럼 어렵기만 하다.

만약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상황이라면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의 일상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들은 '사회 부적응자'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 어느 동네 카페에 항상 모이는 청년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무언가를 막 상실한 상태는, 살면서 가장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야"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놓인 카페 뒷 켠. 이곳에 동네 청년 두 명이 매일 죽치고 앉아 있다. 재스퍼는 소설을 쓰지만 등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KJ는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다 신경쇠약으로 그만두었다. 이 둘이 여기에서 하는 일이라곤 햇빛을 쬐고, 함께 만든 노래를 부르고, 직접 쓴 글을 읽어주고 평을 듣는 것 정도다. 어느 날 이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 (어수룩하기 그지없는) 고등학생 에반이 재스퍼, KJ와 마주치게 되고, 직원들이 쓰는 공간이라며 그들을 내보내려고 하지만 재스퍼와 KJ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에반은 처음엔 못마땅하고 곤혹스럽기만 하던 그들이 점점 궁금해지는데...  -연극 <외계인들> 줄거리



'서툰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뜬금 없지만, 내가 연극 <외계인들>을 보면서 떠올렸던 것 중에는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이 있다. 실패한 대학강사 아빠, 마약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게이 애인에게 차여 자살시도를 한 외삼촌, 스스로 묵언수행 중인 아들 등등, 사회에서는 이미 실패한 인생이라고 낙인 찍혔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러면 좀 어떠냐고 되묻는다.

그들에게는 길거리에서 멈추는 게 일상인 낡은 봉고차가 있고, 그것을 함께 밀어낼 가족이 있다.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함께 털털 거리며 달릴 수 있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연극 <외계인들>의 재스퍼와 KJ도 그렇다. 온종일 카페(도 아닌, 카페 뒷 켠에 숨겨진 공간)에 앉아 노닥이며 둘은 노래를 부르거나, 글을 쓰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서로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소통이 되고 있는 건지는 영 의심스럽다. 강박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KJ는 갑작스럽게 포복절도하거나 울거나 분노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하는데, 재스퍼는 이를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며 자기 할 일을 한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둘만의 세상에, 카페 알바 청년 에반이 끼어든다. 아니, 둘이 먼저 그를 받아들인다. 그 까다로운 재스퍼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KJ가 말이다. 그건 아마도 어수룩한 태도와 불안한 표정의 에반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 아닐까?


괜찮아, 우린 천재야. 너도 천재일지도 몰라!

 

KJ는 에반에게 어떤 소식을 전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어릴 때 나는 머릿속에 '사다리'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 그래서 나는 계속 말했어. 사다리, 사다리, 사다리..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그러는 거야. KJ, 내 손을 잡고 네가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크게 말해, 그래도 된단다. 그래서 나는 말했어. 사다리, 사다리, 사다리...." 그는 정말 '괜찮아질 때까지' 에반의 손을 잡고 그 단어를 반복한다. 수줍게 시작한 말투가 흥분으로 가득차고 분노에 이어 슬픔으로 지쳐 가라앉을 때까지, 무언가를 토해내듯 KJ는 백번도 넘게 '사다리'를 외친다. 에반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하지만 끝까지 KJ가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그에 힘을 얻은 것일까. 결국 스스로 '사다리'를 멈춘 KJ가 에반에게 숨겨왔던 사실을 고백한다.


극중 KJ가 '사다리'를 외치는 장면은 관객의 감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점이다. 사실 KJ가 '사다리'를 십여번 정도 외치고 멈추었어도 관객들은 이 장면의 의도를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극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관객이 편안하게 이 장면을 지나치도록 만들지 않는다. KJ는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절규하며 코앞의 관객들을 향해 '사다리'를 외치며, 그것은 끝날 듯 끝나지 않을 듯, 관객이 '아직도야?'라는 의문을 얼굴에 가득 띄울 때까지 계속된다.


이 부분이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다. 관객들에게 기이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이제까지는) 막연히 친밀하게 느껴졌던 KJ는 이 순간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우리와 다른 언어로 말하는 외계인'으로 보인다. 그의 절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고 불편해진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이 순간 진짜 그를 보았다는 생각이, 이제야 그에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도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KJ는 에반에게 기타를 선물하며, 그앞에서 노래하기 부끄러워하는 에반에게 확신에 가득찬 어투로 말한다. "재스퍼는 천재야! 나도 천재고! 너도 천재일지도 몰라!" 이 어이없는 격려에 힘을 얻어 에반은 노래를 부른다. 밖으로 온전히 내지르지 못하고 항상 안으로 먹어들어가는 발성으로 말했던 그가 드디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르고 KJ는 그 곁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 그 둘의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작가는 <외계인들>을 통해 효과적이지 않은 언어,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통의 어긋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관계라는 비논리적인 순간을 강조한다. 실제로 보여 지는 것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순간, 사이들이 오히려 대사보다도 중요함을 내포하고 있다.  -연극 <외계인들> 공식보도자료 중에서







+배우 후기


개인적으로 공연을 보러 많이 다닌다고 하지만 세상엔 아직도 내가 모르는, 좋은 배우들이 참 많다. 연극<외계인들>의 세 배우는 모두 이 극에서 자신의 역에 최적화된 연기와 외양을 보여준다.


-재스퍼역 박용우 배우

까칠한 예술가 같은 외양에 소설쓰기에 열중하며, 불같은 성격이지만 친구를 챙길 줄 아는 사람. 자신을 걷어 찬 애인을 잊지 못하는 남자. 친구가 없다는 에반을 둘만의 파티에 초대하며 "끝내주게 재밌을 거야!" 라고 말하던 표정이 생각난다. 에반의 말처럼 "끝내주게" 멋있는 남자였다.

-KJ역 최순진 배우

최순진 배우는 극의 첫 장면, 하늘을 바라보며 '3차원의 슈퍼스타'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만으로 관객을 자신의 세계로 바로 끌어들이는 그의 연기가 놀랍다. 이 역은 최순진 배우라 가능한 영역이 분명 있는 것 같다. 막공때는 그가 '사다리'를 무한대로 외칠 때 관객석에서 함께 외치고 싶다는. (하지만 무리)


-에반역 안지환 배우

카페 뒷문으로 그가 처음 등장할 때, 그 어수룩하고 어색한 모습에 관객들도 같이 당황스러워진다. 그는 마치 무대에 난입한 일반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는 귀여워하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안지환 배우는 마치 미국 헐리웃의 소위 '너드 영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를 겉과 속 모두 충실하게 표현해낸다. <외계인들>이 그의 데뷔작이라는데 앞으로도 무대 위에서 계속 보고 싶은 배우다. 



커튼콜, KJ와 에반 사이로 재스퍼가 내려오는 모습 ㅎㅎ 








연극<외계인들>을 공연중인 국립극단 소극장 판, 서울역 뒷편에 있다.

"여기에 공연장이?' 싶은 위치에 천연덕스럽게 꽤 넓은 부지로 자리잡고 있는 극장. 이것마저도 좀 외계인스럽다 ㅎㅎ





세 배우분 모두 수고하셨어요!




좋은 후기는 간략하게 쓰는 거라는데, 그런 재주가 없어서 오늘도 길게 써버렸다. 더구나 좋은 연극을 만났을 때는 더욱 길게 쓰고 싶어진다. 그 감상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겠지.


후기의 마지막으로, 극중 재스퍼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의 글을 남기려한다. 재스퍼와 KJ가 결성하려고 했던 밴드의 이름 후보이기도 했던 '외계인들'. 이 글의 내용이 바로 재스퍼와 KJ, 에반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다.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해지길 바란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