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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선 님, 구조선 님, 안경을 찾아 왔어요."

  "내가 안경이라고요! 내 이름이 구조안경이라고요? 아이가 안경을 쓴다고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안경은 노인들이나 쓰는 거예요."

  "나 '눈 달린 거울'은 아주 멀리 숨겨진 곳을 보고 싶어요."

  "숨겨진 것을 보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좀 다른 문젠데요."

  "'눈 달린 거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렇다면 호두껍데기로 만든 안경을 줄게요."

  "꿈을 보라고 말이에요?"

  "내 이름은 이미 그걸 말해주고 있어요. 내 이름은 물안경이고, 수많은 욕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안경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들은 호두껍데기로 만든 것이지요. 또 꿈을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인데……."

  "잘 있어요, 물안경님."

  "눈 달린 거울님!"

  '주인 없는 여주인'이 말했습니다.

  "없는 것을 보지도 말고, 있는 것을 쳐다보지도 말아요. 꿈의 안경을 쓰도록 해요."


<세상을 다 가진 남자(El Hombre Que Lo Tenia Todo Todo Todo)>,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지음, 송병선 옮김, 문학수첩, 2005. p118~119.



"어떤 사람에겐 폭력일 수 있습니다. 조속히 해체해주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지하철 안에 달린 TV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붙여놓았다. 

A4 용지에 검은 매직으로 큼직하게 써서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저런 걸로 시비지? 광고 좀 나오는 게 뭐가 대수라고.' 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영화관에 앉아 10분 동안 아무 생각없이 광고만 보면서 새삼 느꼈다. 

광고가 우리의 생각에 굉장히 쉽게 침투한다는 걸. 생각보다 우리는 광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걸.


지하철에서 예의 문장을 보았던 것만큼 당혹스러운 표현을 접한 경우도 있었다. 

'아이 쇼핑'이라는 단어가 그것이었는데, 처음 들었을 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재미로 물건 구경한다는 의미란다. 

'아이야 구경하는 거니까 눈(eye)을 의미하는 거고……. 그런데 사지도 않으면서 왜 '쇼핑'이란 단어를 붙인 걸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허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맛을 들이고 난 뒤 깨달았다. 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걸. 

이 점에서 eye와 shopping의 결합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보는 것과 소유의 욕망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이리도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는 또 없을 것이다.


과테말라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 아스투리아스가 쓴 <세상을 다 가진 남자>는 시종일관 '보는 것'과 '소유'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주인공인 세상을 다 가진 남자는 말 그대로 세상을 소유한 남자이다.

헌데 이 남자의 소유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소유 방식은 그저 보는 것이다. 그는 시각을 통해 이미지를 소유함으로써 사물을 소유한다. 

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남자가 가진 '금속을 끌어들이는 능력'을 사람들이 탐내면서 그는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 휩쓰려 살게 되면서 그의 소유관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여전히 보는 것으로 사물을 소유한다. 

그러나 '소유'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가 물건에 소유권을 주장하듯, 남자는 자신이 본 모든 물건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남자의 변화는 결국 비극으로 이어진다.

아들(눈 달린 거울)이 갖고 싶어하는 아보카도 씨로 만든 안경을 얻기 위해 남자는 아보카도 나무에게로 찾아간다.

그는 아보카도 나무에게 '너는 내 소유이니 씨앗을 내놓아라'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보카도 나무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씨앗을 줄 수는 없다고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세상을 다 가진 남자는 아보카도 나무를 잘라 불태워버린다. 

이 사실을 안 나무들은 그를 숲의 재판에 회부하고, 죽은 아보카도 나무를 대신해 나무로 살 것을 명령한다. 

그는 결국 나무로 변해 영영 숲에서 살게 된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자가 만일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말 그대로 보는 것들을 전부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그 욕심 때문에 나무를 살해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각 시대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질병이 있다고 정의한다. 

이와 유사하게, 나는 각 시대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범죄가 있다고 생각한다.

(범죄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리고 욕망은 일정 부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우리 사회에서 소유의 욕망과 소비는 당연시된다. 당연시를 넘어,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노출되고 유혹한다. 

이런 사회에서 금전을 목적으로 한 살해나 사기가 만연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과연 소유의 욕망이라는 망아지 위에서 떨어져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망아지를 제어할 수 있을까? 

세상을 다 가진 남자의 최후를 보며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소유의 문제에 대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부성(父性)에 대한 작품으로 봐도 흥미롭다.

세상을 다 가진 남자나 아보카도 나무 모두 자신의 자식을 위해 행동한다.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위험한 지경까지 발을 들이는 남자를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찡해진다.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치고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도중에 수수께끼 같은 부분들이 좀 나오는데 그냥 술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동화적 성격이 강하다. 동화를 분석하는 건 전문가들의 몫이지 독자의 몫은 아니다.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는데 굉장히 귀엽다. 책에 별 관심 없더라도 일러스트는 한 번 볼 만하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