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소년이 있습니다.

소년은 세상에게 버림받은 것 같아 화가 났고 그래서 무엇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소년의 존재조차 모르는 아버지이지만 세상한테서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소년은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그런 소년 앞에 한 소녀가 서 있습니다.

팔짱을 낀 채 당돌하게 으름장을 놓던 소녀

그 소녀의 투명한 얼굴에 손을 댄 순간 소년은 저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릴 새도 없이 소녀는 다시 소년 앞에 나타나 소년의 단 꿈을 비웃으며 헤집어 놓습니다.

소년은 약이 올랐습니다.

'그럼 네가 나를 꼬셔봐. 너한테 미쳐서 공부도 못하게, 검사 같은 거 꿈도 못꾸게. 네가 날 못 꼬시면 내가 널 꼬신다.'

소년은 몰랐습니다.

소녀에게 함부로 쏟아냈던 심술궃은 말들이 결국 비수가 되어 돌아와 소년의 심장에 꼿힌다는 것을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소녀는 떠났습니다.

아직 해줘야 할 짖궃은 말들이 많이 남았는데 소녀는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그 겨울, 바쁜 마음으로 소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소녀에게 그렇게 함부로 장난치지 않았다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녀 목소리에 온 몸이 굳어 숨소리 조차 낼 수 없게 되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가여워서 애틋한 건지 애틋해서 가여운 건지 알 수 없어 이토록 혼란스러워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4년이 흘렀습니다.

소녀는 꿈만 같이 소년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소년의 심장이 마구 뜁니다.

하지만 여전히 투명한 소녀의 얼굴을 보니 혼자만의 그리움이었던 것 같아 심술이 납니다.

그래서 소년은 또 다시 소녀에게 함부로 장난을 칩니다.

그런데 소녀가 웁니다. 너무나 서럽게 웁니다.

소년은 왜 우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때 피투성이 작은 새 한 마리가 소년의 심장 속에 날아와 둥지를 틀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을, 소녀를 우연히 다시 마주치지 않았다면, 심장이 그렇게 제 멋대로 뛰지 않았다면 소녀를 차가운 침대 위에 눕혀 놓고 눈물 흘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소년에게 허락된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남아있는 삶마저 기꺼이 내 놓아도 소녀를 곁에 둘 수 없는, 자격없는 놈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소년의 손길이 닿을 때 마다 소녀는 부서졌고 그래서 소년은 피투성이 새 한 마리 심장에 가둔 채 더 이상 소녀를 볼 수 없습니다,

아니, 두 번 다시 만나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소녀가 소년 앞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투명한 얼굴로 안부 인사 한 마디 없이 서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건만 소녀는 겁도 없이 소년 앞에 서 있습니다.

소년의 심장에 둥지 틀었던 작은 새가 지저귀기 시작합니다.

쉴 새 없이 재잘대서 소년은 자꾸 흔들립니다.

밀어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소녀를 방에 숨겨놓고 매일 매일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얼마나 소녀를 아프게 할 지 알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습니다.


 ' 난 열심히 도망쳤다. 난 열심히 도망쳤는데 니가 아직 여기 있는 거다.'

이제 영원히 잡은 손 놓지 않겠다며 소년은 소녀에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소년은 깨닫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소녀는 소년의 심장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을

그래서 이토록 서로 아픈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끝이 보이는 사랑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