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저를 오싹하게 만든 것은 나약하고 가엾은 소피 메이슨의 유령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요란스러운 목소리였습니다.
소피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조차도 소피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느꼈는데, 그 남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자기 얘기만 떠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피츠버그에서 큰돈을 벌어 성공했다는 자랑만을 끊임없이 말이죠."
<세계 호러 걸작 베스트>, 에드거 앨런 포 외 지음, 북타임 옮김, 북타임, 2010. p123.
안녕? 도갤러들아. 1일1글 마지막 이후로 오랜만이네.
책 좀 읽어서 글감을 모을 생각이었는데, 요즘 통 책을 안 읽어서 글 쓸 일이 없었다.
근데 오늘 재밌게 읽은 책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찾았는데, <세계 호러 걸작 베스트>란 책이야.
요즘 공포소설에 관심이 있어서 조금씩 사모으고 있어.
왜, 그 좋은 문학 작품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잖아.
근데 독자 마음을 움직이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공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특히 공포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인 탓에 활자 같은 추상매체로 구현하긴 어렵거든.
좀비 영화를 보는 것과 좀비 소설을 읽는 것 중 어느 게 더 무서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거야.
한 마디로 활자로 독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려면 어지간히 글을 잘 써야 된다는 얘기지.
그래서 공포소설 작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다 좋은 편이야.
에드거 앨런 포나 로드 던세이니, 사키 같이 잘 알려진 작가들 작품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작가들 작품들까지.
모든 작품이 전부 인간이 공포를 느낄 법한 순간들을 잘 묘사하고 있어.
단순히 피가 난자하고 살점이 튀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화자가 인식하던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변하는 순간 기분이 묘해지더라고.
물론 현실이 비현실로 바뀌는 과정은 작가별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어.
자신이 그린 그림 속 남자가 자기 묘비명을 새기는 걸 발견한다든가, 이야기 속 유령이 눈앞에 나타난다든가, 초월적 존재와의 우연한 만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이 책이 마음에 든 또 다른 이유는 단순히 장르적 재미 뿐만 아니라 작가 특유의 문제의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야.
에드거 앨런 포의 <곤경>은 공포소설 창작법 강의인 동시에 공포소설 그 자체이기도 해.
로드 던세이니의 <계곡의 유령>은 과학과 진보라는 미명 아래 사라져 간 전설과 신화적 존재들에 대한 애도이고,
레녹스 로빈슨의 <얼굴>은 가상의 존재가 현실로 침입한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연상케 해.
E. M. 델라필드의 <돌아온 소피 메이슨>은 가해자가 가장 먼저 잊는다는 슬픈 진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알프레트 되블린의 <민들레 꽃의 살해>와 연결되고.
단순히 무섭기만 한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책의 재미야.
하지만 이 책은 굉장히 허접한 책이기도 해.
게다가 아주 치명적인 약점도 있어.
번역자와 번역서의 출처가 명시되지 않아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책이야.
특히나 에드거 앨런 포의 <곤경>은 번역팀이 작품을 번역한 게 아니라 아예 고쳐 썼더라고.
애초에 에드거 앨런 포가 1849년에 죽었는데,
그가 쓴 작품에서 1850년에 태어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1887년도에 처음 출판된 셜록 홈즈 시리즈가 언급된다는 게 말이 되니? -_-;;
100% 번역팀이 장난질 한 거지....
처음 읽었을 땐 "어? 이상하다" 했는데, 확인해보니까 실망감을 넘어 황당함까지 느껴지더라구.
사실 나는 번역팀이 재창작(?)한 <곤경>도 나쁘지 않다고 봐. 충분히 재밌어.
하지만 자기들이 임의로 바꿔 쓴 걸 원작인 것처럼 아무 코맨트도 없이 출판하는 건 출판사 실격이지.
왜 이 책이 절판됐는지 알겠더라.
(사실 출판사가 망해도 할 말 없지)
동시에 "이렇게 재밌는 작품들을 잘 뽑았으면서 왜 이따위 짓을 한 거지?"라는 아쉬움도 들고.
번역만 신뢰할 수 있었다면 좋은 책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내 감동 돌려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이지만, 그래도 재밌긴 재밌어.
각 잡고 읽을 만한 책은 절대 아니야. 아까 말했듯 번역에 문제가 많은 책이니까.
대신 해적판 만화책이나 찌라시 읽는다 생각하고 술술 읽을만한 책이야.
시간이 나면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작품을 따로 찾아서 읽어보고 싶네.
도갤럼들도 시간 나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함 읽어봐. ㅋㅋ
간만이다 ㅋㅋㅋㅋ
표지도 좋고 우왕했는데 출처가 쇼킹하네 ㅋㅋ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