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일본 사회당의 사사키 코죠우 위원장이 마오쩌둥에게 “중국 국민에게 막대한 손해를 가져와 미안하다”고 인사하자
마오쩌둥은 “그렇지 않다. 일본 군국주의는 중국에 큰 이권을 가져왔으며 중국 인민에게 권리를 되찾아 주었다. 여러분 황군의 힘이 없이 우리가 권리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발언했다.
또 마오쩌둥은 1972년 중일 수교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에게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감사를 드린다. 만일 그 전쟁(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중국 공산당이 천하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주보는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연구원인 천톄젠(陳鐵健)이 인용한 ‘마오쩌둥 외교문선’을 실었다.
중국공산당이 직접 출판한 이 외교문선에는 마오쩌둥이 1950년대에 중국을 방문한 한 일본인에 대해, “사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표본이 됐다. 첫 번째로 장제스(蔣介石)의 힘을 약하게 해주었다. 두 번째로 우리 공산당의 근거지와 군대를 발전시켜주었다. 항일전쟁 이전, 우리 군대는 30만 명에 달했지만 자체 작전 실패로 2만 명으로 감소됐다. 그러던 중 8년간 항일 전쟁으로 우리의 군대는 120만 명으로 발전했다. 일본이 우리를 도운 게 아닌가?”라고 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08년 베이징시 당국의 기관지 ‘베이징일보’는 “마오쩌둥의 일본 침략 감사발언을 정확하게 이해하자”라는 문장을 게재해, 마오쩌둥이 말하는 ‘감사’는 ‘경쟁자에 대한 감사’와 같은 의미로 마오쩌둥식 발언의 습관 및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천톄젠 연구원은 항일 전쟁사의 전문가 장전쿤(張振鵾)의 ‘감사는 감사다’라는 문장을 인용해,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국민당군을 패배시켜 점령지를 확대해 갔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일본이 우리를 도왔다’라며 늘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천톄첸 연구원은 감사라는 표현은 일시적인 착상이나 유머가 아닌 마오쩌둥의 진심어린 표현으로, 마오쩌둥의 ‘혁명 공리주의’에서 나온 말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인민이 얼마나 죽었던 관심 없었고
자신이 권력을 잡았으니 그만이라는 결과론(자칭 공리주의)으로
일본의 침략을 천운으로 여기고 진심으로 감사해 했던 것이다.
전후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은 “일본에 감사드린다. 덕분에 천하를 차지 할수 있었다. 우리는 승전국이니 배상은 받지 않겠다”고 말해 난징 시민들에게 절망을 안겼다.
당시 난징 지역 주민들이 반발해 시위 단체를 만들어 항의했으나 마오쩌둥은 군대를 보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일본의 침략이 고맙기 때문에 살아생전 난징의 사건을 일절 언급하지도 않고, 은폐하다가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시간이 지난 1985년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 희생자 동포 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기념관을 건설하고 난징학살에 대한 사건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펑더화이는 훗날 마오쩌둥의 내란집단인 홍위병에게 수모를 당한다.)
펑덩화이가 일본군을 상대로 항일전투를 벌이자…
「(팔로군 부총사령관)펑덩화이는 우리 편이 아니다. 백단대전(百團大戰)은 국민당을 도와 일본을 무리쳤던 것인데 이는 장개석 국민당군의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애국이 아니다. 일부 동지들은 처음에 일본이 영토를 적게 점령할수록 좋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나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일본이 영토를 많이 점령하게 해야 우리측에 유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개석의 나라를 애국하는 꼴이 된다. 나라중에 나라 만들고 장개석, 일본, 우리(공산당) 삼자가 각축을 벌리는 ‘삼국지 형국’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리루이(李銳)(마오의 비서이며 수력부 부부장,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을 지냄), 로산(廬山)회의 실록, 한태격,2015, 중국 전승절과 역사도용(歷史盜用) 에서 재인용
마오쩌둥: "펑더화이? 그 새끼 괜히 일본군 상대해서 국민당만 도와줬으니 반동새끼임, 일본군이 국민당을 약화시켜야 우리한테 유리하다고!"
(실제로 한말)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합작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발전할 수 없고 집권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는데 내가 보건대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리즈수이(李志綏)(마오의 주치의 겸 비서), 마오쩌둥 주치의 회고록, 한태격,2015, 중국 전승절과 역사도용(歷史盜用) 에서 재인용
공산당은 내내 후방에서 국민당 팀킬만 하고 항일 한 것도 없는데
자칭 전승절이니 뭐니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
1956년 연말, 모택동은 진운(陳雲)등과 일본의 기업가 난고 사부로(南鄕三郞)일행을 접견한다.
난고 사부로는 과거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데 대하여 "만일 장래 일본이 중국의 성 하나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전에 일본침략자들이 중국의 절반을 점령했다. 만일 그런 민족위기감이 없었더라면, 압박을 오래 받아온 중국인민은 아마도 혁명에 각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단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직 산 속에 있을 것이고, 북경에 와서 경극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기조는 정책에서도 엿보이는데
마오쩌둥이 중국인 78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대약진운동"
이때 마오쩌둥이 한 말이 걸작인데
'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不够吃会饿死人,最好饿死一半、让另一半人能吃饱。
마오쩌둥, 1959년 2월, 상하이 금강반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수확량의 3분의 1까지 징발할 것을 지시하면서
신념하나는 확고했던 새끼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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