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쉬고 있냐. 나는 유튜브 보면서 낄낄대고 깔쭉대면서 즐겁게 잘 쉬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좋게 봐 주어서 솔직히 기분이 좋다.
난 너희들에게 내 임용인생을 말하며 너희들은 정말 엘리트고 위대한 사람들이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계속 길어진다.
솔직히, 내 인생은 임용판에 있는 평범한 임용생들에 비해서는 굴곡이 많은 것 같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ㅋㅋ
여튼 너희들이 너무 고마워서라도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만일,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티끌만큼의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거니까.
교육대학원에 들어가서 2학년 1학기에 교생실습을 나가게 됐다. 나는 대학원에서 지정해 주는 학교가 아니라 모교에 내가 지원을 넣어 교생실습을 가겠다고 행정실에 말하고 교생실습을 준비했다.
나는 사립 남고를 나왔다. 내가 생활했던 그 학교에, 내가 국어 교사의 꿈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교생실습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을 뵙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을 뵙고 싶은 내 마음은 사실 이중적이었다.
물론, 나도 인간이니까 내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것은 자랑이라기 보다는 당신들에게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증명을 하고 싶었었다. 떳떳하고 싶었다. 그저 사춘기 청소년의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선택이 아니라,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내 모습을 보임으로써 스승님들께 자극을 주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거만하고 오만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매너리즘을 느낀다. 그것은 교사 역시 분명 마찬가지일 것이고, 내가 교사도 선생도 아닌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들께서 매너리즘에 안 빠질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것은 비단 직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나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었다. 항상 처음같은 마음과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와 헤어져야만 했던 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나에게만큼은 공자보다 위대한 스승님들께서 그런 지루함과 우울함에 빠져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내가 학창시절 때보다 훨씬 오만해졌다는 것의 반증이었을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는 오만의 티끌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나는 보여 드리고 싶었었던 것 같다. 당신들의 제자가, 당신들 덕분에 꿈을 꿀 수 있었던 한 사람이 진짜 꿈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당신들께서는, 힘들어도 결코 학생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학생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 학생들 중에 나같은 병신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병신들을 위해서라도 지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를 통해 보여 드리고 싶었다.
교생실습의 한 달은 꿈만 같았었다.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께서 여전히 많이 남아 계셨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을 술 자리에 불려 다녀 엄청 피곤했었던 것은 있었다. 그래도 정말 좋았다. 내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대학원에서 만들어 준 교생증을 목에 걸고 당당하게 선생님들의 앞에 섰을 때, 선생님들께서는 진심으로 놀라셨고, 또 진심으로 나를 칭찬해 주셨다.
교실에는 내가 입던 교복, 내가 매던 넥타이를 맨 꼭 나같은 녀석들이 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교실에 학생이 아니라 교생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었다.
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은 마치 나를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내 후배들 앞에 세웠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고등학교 생활을 말해야만 했었다. 선생님들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모델링 학습의 모델이 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서울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낮다고 소문난 동네이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그 동네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께서 지방에서 올라 와 처음으로 정착한 서울의 외곽 지역. 술을 한 잔 먹으면, 내 친구들은 항상 이야기했었다. 성공해서 돈을 벌면 제일 먼저 이 뭐같은 동네부터 떠날 것이라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동네는 학업성취도는 최하위면서 학교폭력은 최상위인 동네였다. 물론, 그 사실은 내가 교생이 되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나의 후배들의 삶도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었다. 시대가 변해도, 이런 낙후된 지역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처럼 힘든 녀석들도 많았을 것이고, 나보다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최악에 대한 차악의 정도인 학생들이 많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동네의 그런 놈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후배들의 앞에서, 나는 적당히 솔직해야 했었다. 선생님들께서는 아무리 네가 교생이고 걔네들의 선배라도 교사가 학생들에게 너무 솔직해도 안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솔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들께서 후배들의 앞에서 나에 대해 거창하게 말할 기회를 주실 때마다, 내 학창시절에 대해 거짓없이 말했었다.
학생들도 내 이야기를 듣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행정실에서 내 생활기록부를 떼서 아이들에게 보여 주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나도 가끔은 내 삶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
내가 수험생이었었을 때도, 내가 교생이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동네에서 내가 다녔던 대학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잘난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이름을 대면 사람들이 알 정도의 대학을 나온 것이지, 최상위권 대학을 나온 것이 아니다. 그냥 그만큼 우리 동네의 교육 환경은 열악하다.
학창시절을 너무도 솔직하게 말하던 나에게, 선생님들께서는 괜찮냐고 물어 보셨었다. 내 체면이 상하는 것을 걱정하셨었던 것 같았다. 체면따위는 상관 없다. 나는 적어도,아이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주고 싶었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비참하고 우울한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모래알같은 희망이나마 아이들이 쥘 수 있다고 한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분명히 간절한 놈들은 있으니까.
나는 SNS도 하지 않고, 카카오 스토리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휴면이 된 내 카카오 스토리에는 아직도 나의 첫 학생들이었던 녀석들과의 단체 사진이 남아 있다.
그렇게 꿈 같았던 교생실습을 마무리 하고,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논문 심사를 준비했다. 학부에서 졸업 논문 대체 수업을 들었었기 때문에, 나는 논문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게다가, 내 지도 교수님께서는 사범대학 조교도 두려워하는 사범대에서 가장 무섭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교수님이셨다. 그리고 난 실제로 보았다. 논문주제로 이것저것 상담을 하러 갈 때, 연구실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고민하다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국어교육과 학부생들을.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그들은 언제나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 친구들보다 머리는 나쁠지 모르지만, 난 그 친구들이 가지지 못한 깡이 있었다. 교수님은 서울대 출신의 여자 교수님이셨다. 처음 교수님과 독대할 때는 나 역시 긴장도 많이 하고 매우 어려웠었다.
나는 논문주제로 지도 교수님과 많은 마찰이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국교론 전공이셨다. 교수님의 논문은 교육과정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다들 알겠지만, 석사 논문은 지도 교수님의 전공과 관련한 주제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나는 문학교육 논문을 쓰겠다고 계속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사실,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석사 논문은 지도교수님의 결정권이 매우 크기 때문에, 철저하게 대학원생은 보통 을이다. 게다가, 나는 사범대 학부생도 아니었던 학생이었다. 당신께서 강의를 하여 키워 낸 학부생이 석사 과정을 밟고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할 판국에, 국문과에서 온 이상한 꼴통 하나가 죽어도 문학 교육으로 논문을 쓰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정도를 거친 사범대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국교과 학부생들뿐만 아니라 국교과를 졸업하고 조교를 하고 있는 학과 조교조차 독대를 어려워하는 무서운 교수님인데, 나는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까다로우신 경향은 있어도 따뜻한 분이셨다.
어쩌면, 내가 선생의 길을 더 굳게 마음 먹은 데에는 지도 교수님의 영향이 매우 컸을지도 모른다.
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또라이였었다. 간혹 교수님께서 정하신 논문 보고 시간에 늦었다. 늦으려고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 때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난 솔직히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서는 내 사정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어 하셨고, 난 내 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 이후부터, 교수님께서는 나를 부르실 때면 항상 롤케익이나 떡, 고급 과자같은 맛있는 것을 주시곤 하셨다. 내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담백하면서도 너무 달지 않은, 누구든 먹으면 고급지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내 앞에 두곤 하셨었다.
교수님께서는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고 하시기도 하셨고, 아예 비싼 롤케익 하나를 다 나에게 주신 적도 있었다. 다들 그 교수님을 무서워했지만, 나에겐 전혀 무섭지 않은 분이셨다. 마치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감싸주는 마음씨 따뜻한 보육 교사처럼, 나에게 항상 무엇이든 더 해 주려고 하셨다. 물론, 논문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 혼났다. 공은 공이요, 사는 사인 분이셨다.
나는 논문 지도를 몇 번 받은 후부터는 지도 교수님을 더이상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게는 교수님이라는, 뭔가 다가갈 수 없는 어떤 공고한 벽이 느껴지는 그 호칭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교수님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계시는 나이가 꽤 많은 조교분은 나를 매우 신기해 하셨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 교수님을 부르면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처럼 시시콜콜, 이것저것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는 나를,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입 안에서 빵을 씹고 떡을 쳐먹으며 교수님께 질문을 하는 나를 무척이나 신기해 하셨다. 그런 나보다, 그것을 모두 허용하며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계시는 교수님을 조교님은 더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교수님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내가 연구실에 가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 때, 조교님과 둘이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조교님은 지도 교수님이 무섭지 않냐면서 나를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말하였다. 교수님이 나를 대하는 것도, 내가 교수님을 대하는 것도.
실제로 나는, 교수님께서 학부생들을 앞에 세워 두고 엄청 냉정하고 위엄있게 야단을 치는 모습을 본 적도 많이 있었었다. 그리고 학부생들이 나간 후에, 교수님께서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과일을 손수 깎아 내 앞에 놓고 먹으라고 하시고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내 생활에 대해 물어보시곤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런 교수님이 마치, 내게는 있지도 않은 어떤 먼 친척인 큰엄마 같았었다.
결국, 나는 문학 교육으로 논문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지도 교수님께서 자신의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가 부족할 수 있다고 염려하셔서, 문학 교육을 전공하신 교육대학원 학과장 교수님께 부탁하여 이중으로 논문 지도를 받으라고 내게 말하셨다.
그 말을 들은 날, 대학원 앞 벤치에서 담배를 세 개비를 연속으로 피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을밤 아홉 시의 칠흑의 하늘을 보며, 담배 연기를 뿜었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왜 맨날 꼬이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하늘이 깜깜은 해도, 그렇게나 깨끗했었다.
나는 교육 대학원 최초로 두 분의 지도 교수님을 모시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 논문은 논문심사에서 꽤 좋은 평을 받았다. 그리고 내 지도 교수님 두 분께서는 모두 내게 박사 과정을 권하셨다. 논문을 아주 잘 쓴 것은 아니지만, 가장 논문다운 것에 근접한 논문이 내 논문이라고 엄청난 호평을 해 주셨다.
할 수만 있다면 사실 하고 싶었다. 논문을 쓰면서, 내 스스로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것의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세 시간 동안 단 한 문장밖에 쓰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논문을 쓰는 것에 대해, 내 주제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법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일까. 그 때처럼 RISS에서 많은 논문을 보고,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책을 봤었던 적도 없었다. 지도 교수님들께서 방향이나 문장, 내용이나 형식 등을 다듬어 주시면서 논문이 좋아질 때마다,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공부의 즐거움을 느꼈었다. 어떤 교재가 존재하거나 어떤 방법이 정형화된 공부가 아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공부를 난 처음해 봤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박사과정을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게는 무엇보다 뚜렷한 목표가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쉽긴 아쉬웠다. 사범대학 건물 앞의 벤치에서 하늘을 밤하늘을 바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내 마지막 대학원 생활을 토해냈다. 겨울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별처럼 반짝이는 인공위성의 빛 뿐이었다. 난 그것을 항상 별처럼 생각했다. 국어 교사, 내 눈에는 오로지 그 별만 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내 책꽂이 맨 위에는 지도 교수님이 연필로 직접 글을 써서 지도 내용을 기록해 주신 스프링 제본의 논문 중간본이 여러 권 있고, 대학원 교수님 네 분이 친필 서명을 하신 내 논문이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다.
본격적인 임용 준비 이야기도 다 쓰려고 했는데, 저녁도 먹어야 하고 해서 오늘은 다 쓰지 못할 것 같아 끊었다. 누워서 멍 때리며 유튜브를 보고 싶기도 하고.ㅋㅋ
내일 마저 쓰겠음. 다들 맛있는 저녁 먹고 푹 쉬어라.
ㅅㅅ
넌 사람운이 있는거 같다. 저런 지도교수 거의 없는데. 자존심 쎈 교수들이 대부분이라 쫓아내지 관련전공 교수랑 같이 논문지도 왠만하면 안해줌ㅋㅋ 나이 지긋한 원로교수 아니면ㅋㅋ
그런 것 같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다 구라라고 해서 증거를 다 보여 주고 그랬었다ㅋㅋ 심지어 대학원 동기들도 다 안 믿었었음 ㅋㅋ
오늘 종일 기다렸어요 4편도 빨리 부탁 드려요
네 내일 쓸게요. 고맙습니다. 졸필인데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글 재미있게 잘 쓰시는데요? 하시는일 다 잘 되실거에요!
고맙습니다.
일어나세요 빨리 글써주세요
네. 노력하겠음. 방금 일어남.
ㅉㅉ
이야 국교가면 글쓰는것도 배움?
아니ㅋㅋ글을 쓰는 것은 글을 많이 볼 수록 조금씩 좋아지더라. 국문과 교대원 국교전공을 하면서 맨날 글만 봐서 그런 듯. 국문과에서도 대학원에서도 글 쓰는 것은 안 배운다. 문창과에서는 배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