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php?id=39b8d1&no=24b0d769e1d32ca73dec87fa11d0283123a3619b5f9530e1a1306968e3d9ca0a3fd3a82f3ffb51d43009bb4140ff6bdf2859702272cd93b4b14c44bd57ae4d


벌써 1년 전이다. 내가 커피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스벅 블랜딩 원두만 사먹던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원두를 볶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이번주 먹을 원두가 부족했기에 100그램만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스페셜티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볶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볶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통을 돌리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볶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볶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볶을만큼 볶아야 커피가 되지, 생두를 갈아 내린다고 커피가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볶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볶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씁슬하고 텁텁해진다니까. 먹을건 제대로 만들어야지, 볶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볶던 것을 숫제 체반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드립커피를 내리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원두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봉투에 담아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원두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취향이 아니고 제 멋대로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약배전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다. 그 때, 커피를 마시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돋보기 안경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차음갤에 와서 커피를 내놨더니 차붕이들이 맛있게 볶았다고 야단이다. 왠만한 동네 로스터리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벅 원두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차붕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너무 까마면 한약만큼 써서 한모금도 마시기 힘들며, 원두가 너무 안익으면 신맛이 강해서 향미가 느껴지지 않는단다. 요렇게 꼭 잘 볶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원두는 그렇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신맛과 과일맛이 특징이라지만, 너무 강하게 볶아버리면은 군고구마같은 향이 난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주의를 기울여 볶아야 할 것이고, 수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배전도를 찾는 일에만 열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순수하게 한잔의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원두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커피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에 멋드러진 스콘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결점두 몇알이 눈에 들어온다. 꼭 자세히 봐야만 문제가 있는 지 보이는 원두였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안경을 쓰고 있었구나. 열심히 결점두를 손수 골라내고 원두를 볶는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정성 개추"라는 단어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오늘 차음갤에 들어갔더니 념글에서 사대주의 원두를 리뷰하고 있었다. 전에 탄 내음 풍기며 커피를 볶던 생각이 난다. 통돌이 로스터기도 본지 오래다. 요새는 직접 돌려가며 볶은 원두를 좀체 볼수가 없다.문득 1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