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관련 유튜브를 보다가 추천하기에 샀는데 머릿말에 저자가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근무하는 장소가 “근친성폭력피해자모임”(미국)이라는 이름임을 보고 충격을 받고 보기가 힘들어서 책을 몇 개월 방치하다가(실은 안 보이게 숨겨둠) 오늘 대충 훑어봤다.
‘속박’이라는 장을 주로 읽었는데 인상 깊은 부분은 트라우마 상황에 놓인 것이 단순히 일차원적인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나를 비춰주는 인간관계가 파탄났기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므로 인간관계도 정상적으로 맺을 수 없다. 가해자가 유일하게 나와의 관계를 맺는 사람인 상황에서는 피해자는 가해자가 나쁘다는 사실을 잊고자 노력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가끔 폭력 가정의 엄마는 아이를 학대하는 남편을 말리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비급 만화에 가끔 나오는 정신이 피폐해진 캐릭터를 그려내는 사람은 진짜 트라우마가 뭔지 경험해 보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트라우마는 흔히 비급 문화에서 그려지듯이 패션이나 취향으로 소비될 만큼 쿨한 패션적 요소도 아니고 따뜻한 조언자의 말 한 마디로 만만히 치료될 것도 아니었다.
그건 사람에게 홀로 우주에 던져진 것과 같은 길 잃은 공포와 함께, 가해자와의 관계에 불건전하게 집착하게 만들고 내가 겪는 이런 고통이 나때문인가?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며 그 고통은 일생동안 지속되고 삶은 점점 황폐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오래 최대한의 고통이 지속되도록 만드는 잘 고안된 교묘한 고문 기구와 같이.
이건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은 전쟁 상황 등 재난적 상황이 아니라도 일상에서 반복되는 작은 고통으로 인해서도 트라우마의 범위로 인정한다고 한다.
위에 내가 읽은 ‘속박’부분은 물리적 감금도 포함했지만 가정폭력이나 사이비 종교 같이 정신적으로 옭아매는 경우도 포함인 것 같다.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도리어 멍청하다고 욕을 먹는 경우도 있는데 가해자의 정신적 속박은 매우 교묘하고 정교하다.
저자에 의하면 트라우마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일체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혼자서는 대부분 불가능하고 누군가 같이 버틸 유대감이 있는 사람이 한 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주변관계를 다 끊어 놓으려고 한단다. 학교 한문 선생님의 “사람 인자가 왜 2획인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의지해야 어쩌구”하는 18번 레파토리가 떠올랐다.
저자가 트라우마 상황으로 짚는 것에는 요즘 유명한 단어인 가스라이팅도 포함이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그 단어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최근 일명 김딱딱 사건도 생각이 나고, 아무리 봐도 인간 쓰레기에게 모욕을 당하고 돈도 뜯기고 그러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지인 생각이 났다.
그 지인은 지방에서 대학교 입학을 하며 서울로 와서 쭉 집안 도움을 그다지 받지 않고 혼자 생계를 꾸린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설득을 했는데 니가 안 헤어졌으니 난 책임 없다 이 바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찝찝함이 남았는데 그 지인이 뭔가 빠져나오기 힘든 덫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가해자에게 맞아 죽거나 가해자를 죽이거나 하는 기사를 보면서 안타깝지만 왜 진작 도망치지 않았을까 (바보처럼)이라고 의문스러워 했던 부분이 해소된 것 같다. 도망가지 않는 피해자가 어리석다고 여겼던 것이 미안하다.
예전 인터넷 게시판에서 본 글도 생각났다.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사는 여성이 남편이 갑자기 도시에서 인적이 드문 시골로 이사했고 주변엔 이웃이 별로 없었다. 그 후 남편에 직장을 갖는 것도 말리고, 한국의 가족과 전화하면 화를 맨다고 했던 글을 본 게 생각났다. 댓글들이 인간관계를 끊어 고립시키려는 시도인 것 같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글도 생각이 났는데 이 유서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하는 것이 제목이었다. 남편이 아마 이혼하거나 별거중인 부인에게 쓴 것 같았다. 아마 아내가 불만을 제기했던 듯한 사건들 을 나열하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근데 죽을 만한 심각한 내용도 아니었고, 죽을 사람이면 미안한 마음을 품고 죽으면 되지 왜 독자 반응이 궁금하단 말인가 싶었다.
죽을 건데 반응이 무슨 소용이냐 이거 보여줘서 부인 조종하려는 거지? 라고 댓글을 달았더니 글이 지워졌다.
사람은 꼭 물리적으로 막는 게 없다고 자유로운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무엇까지 해도 괜찮은가에 대해 확신이 없고 정신이 통제당하면 머릿속 작은 고문방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슬프게도 상상을 초월하게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의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여튼 이 책은 트라우마 상황별 설명과 함께 회복 방법과 단계도 다루고 있다. 세상에 별 쓰레기 같은 인간과 지옥 같은 온갖 피해 경우가 다 있더라...
예전에는 정말 악인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력범죄를 비롯해서 세상에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나쁜 사람’은 실존한다는 게 점점 분명해진다. 게다가 틈을 보이면 나에게 달라붙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주말마다 그것이 알고싶다를 챙겨보며 사람은 내 생각보다 훨씬 악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실은 범죄 수사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재미로 실제 사건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 때가 있긴
하지만....)
끗
건강해진다고 갑자기 운동했더니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쉬었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과 별로 이야기를 못해서 그런지 글이라도 쓰고 싶었다.
그럼 믕나잇
Mbti는 조금 근거가 있는 혈액형 성격론 아닌가 싶었는데 이 짤을 보고 빵 터진 이후로 많이 부정하지 읺기로 했습니다. (본인 infp)
대지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들도 우리 모르게 트라우마를 준다고 하더라구요. mkultra 미니버전을 전체 사회에 적용한 느낌.
최근의 아동 학대 사건들을 차마 모르고 지나갈 수 없어서 뉴스를 챙겨 보는데 참 힘들어요
오 서평이 훌륭하군요 저 책에 관심생기게되네.. 좋은책 ㄱㅅ
가학이나 피학 모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학대하거나 학대당하면서도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함.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의식적으로 알아차려야 함. 저런 상황을 보면 energy feeding이라는 표현이 떠오름. 상대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이유은 결국 상대의 에너지를 훔치기 위함인 것 같음.
훔쳐서 뭐하려고...나쁜 쉐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