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차가 배척 되었다는 글이 보여서 학부생 시절 적었던 소논문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의 차 문화에 대해서 한번 적어봅니다.
쓸데없이 진지한 글이라 관심 없는 분은 패스하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조선 시대의 차는 크게 산차와 고형차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경우 당시 중국과는 다르게 이 차를 찌는 증청법으로 차를 만들었고, 중국의 경우 차를 솥에서 덖는 초청법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 문인들이 남긴 시구나 책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곡우가 지나기를 기다려 마부와 말, 초료 등을 지급하여 차가 나는 고을로 나누어 보내, 차가 나는 곳을 꼼꼼히 살피게 한다. 절후를 살펴 차를 딸 때는 본읍에서 미리 조사하여 기록해둔 가난한 백성을 인솔하여 산으로 들어가 찻잎을 채취해 모은다. 찻잎을 찌고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되 힘써 기계를 가지런히 정돈하도록 한다. 말리는 그릇은 구리로 만든 체가 가장 좋다.그 나머지는 마땅히 발을 쓴다. 여러 절에서는 밥 소쿠리로 말리는 것을 돕는데, 밥을 담아 기름기를 제거한 뒤에 씻어서 부뚜막에 넣으면,부뚜막 하나에서 하루 열 근을 말릴 수가 있다. 찻잎은 좋은 것만 가려내어 알맞게 찌고 말린다.
待穀雨後 給夫馬草料 分送于茶邑 詳探茶所 審候茶時 率本邑査錄之貧民 入山採掇 敎以蒸焙之法 務令器械整齊 焙器銅篩第 其餘當用簾 而諸寺焙佐飯笥 浸去油 氣入飯後竈中 則可一竈一日焙十斤 揀擇精美 蒸焙得宜
정민,(2006),「이덕리(李德履)저(著)『동다기(東茶記)』의 차문화사적 자료 가치」, 문헌과 해석 퉁권36호, p.92
유동훈. "조선시대 文獻에 나타난 茶의 약리적 활용에 관한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4. 전라남도
위 논문을 보시면 시구를 통해 조선 시대 전반적으로 증청법으로 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초청법으로 차를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긴 하지만 당시 초청법을 알리고자 한 초의조차도 추사가 초의가 이러한 초청법으로 만들어 보낸 차가 너무 강한 불에 덖여진 것을 주의하는 글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다 싶이 당시 조선시대 차를 만들 때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다품은 특별히 보내줌을 입어 매우 심폐가 개운함을 느끼겠으나 늘 덖는 법이 조금 지나쳐서 정기가 녹아날 것 같은 생각이 되니 만약 다시 만들 경우에는 곧 화후를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소.무술년(1838)초파일. 茶品荷此另存 甚覺醒肺 每炒法稍過 精氣有鎖沈之意 若更再製 輒戒火候 如何如何 戊戌佛辰
유동훈. "조선시대 文獻에 나타난 茶의 약리적 활용에 관한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14. 전라남도
조선 시대의 차의 용도는 크게 약용, 의례용, 공양물, 기호품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약용의 경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미신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지금으로치면 타이레놀과 같이 약을 사용하였습니다.
차는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약용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고대 중국 전한 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신농식경에서 “차를 오래 마시면,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생기고,마음이 즐거워진다.(茶茗久服令人有力悅志)” 이와 같이 차의 효능을 언급하고 있으며, 북위 시대에 장읍이 지은 광아에서 “차를 마시면 술이 깨고, 사람으로 하여금 잠이 오지 않게 한다.(其飮醒酒 令人不眠)”와 같은 효과를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조선에서는 차의 약용의 성격이 강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중청법과 관련이 있는데, 중청법은 차의 유효 성분을 유지할 수 있는 제다법이라고 하며, 당시의 약용으로 음용할 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통해 음용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문헌을 보면
晩歲愛幽獨 나이 들어 혼자서 그윽한 것이 좋아
卜居投遠山 먼 산에 거처를 마련했다네.
種茶開藥圃 약초밭을 마련하여 차를 심고
栽竹製漁竿 대나무 깎아 낚싯대를 만드네.
下略......
柳方善 『泰齋集』 卷之一 「卽事」.한국고전번역원.
와 같이 산속에서 홀로 살아 자급자족을 위해 약으로써 차를 심는다고 하기도 하고
김시습의 새벽빛(曉色)에서 “병중에는 차가 약을 겸하니 그대로 좋아라(病裏茶兼藥可仍)”,
이수광(1563-1628)의 병중에 마음을 달래다(病中遣懷)에 “병이 들어 차와 약으로 살아가고(病來茶藥作生涯)”
조문명의 만음(漫吟)의 “아프니 아이에게 차 달이게 하네.(病須兒子候茶烟)”
상께서 말하였다. “황차를 마시면 어떨까?”봉한이 말하였다. “민간에서는 많이들 쓰고 약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께 올리는 약으로서는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것을 가볍게 올릴 수는
없습니다.” 상께서 말하였다.“그렇다.”
上曰 黃茶欲試服 何如 鳳漢曰 閭巷試用多有效 而御藥 不可以未詳根本者 輕易
進用矣 上曰 然矣
『承政院日記』 영조 46년(1770)3월 11일 (무자)원본1302책/탈초본72책,국사편찬위원회
와 같이 차를 약용으로 사용하였다는 다양한 사료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의례의 경우 조선시대 승유억불이 말이 안 된다고 하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차는 동양에서 특정한 예의를 차려하는 의식 등에서 오랫동안 사용 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차의 덖음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차를 마시는 방법 중 점다법이 사라지면서 제사에서 점점 차가 사라졌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사 중에 차를 바치는 것을 우리는 헌다라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통치 이념이 되면서 주희가 쓴 주자가례에 쓰여진 가례를 생활에 있어서 근거로 삼았다. 주자가례에서는 모든 제사의 헌다 의식에서 차를 올려야 하였고, 조선시대에서 이에 근거하여 제례시 헌다의식에서 점다하여 차를 올렸다. 이는 가례집람과 사당 조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가례의절』 본주에 이르기를,‘주부가 다선-‘筅’의 음은 소와 전의 반절이다을 잡고서 점다한다.’ 하였다.대개 먼저 잔탁을 놓고 이때에 이르러서 잔에 찻물을 붓는다. 그런 다음 다선을 사용하여 점다한다.옛날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에 분말을 만들어서 타 마셨는바, 이른바 점다라는 것은 먼저 그릇에 차 분말을 넣은 다음에 끓인 물을 붓고서 다시 차가운 물을 조금씩 넣어 다선을 가지고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다선의 제도에 대해서는 서와 전에 나오지 않는다. 오직 원나라 사종가가 다선에 대해서 읊은 시가 있는데,거기에 이르기를, ‘차군의 마디는 맑은 옥과 같은데,밤엔 솔 소리 듣고 옥가루로 양치하네. 만 가닥의 바람은 해안으로 돌아가고, 반쯤 찬 병 속 찻물 용아를 일으키네.’ 하였는바, 그 모양새를 또한 상상해 알 수가 있다.오늘날 사람들은 찻잎을 달여서 마신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오히려 점다라고 한 것은,옛 풍습을 보존하고자 한 것이다. 혹자는 ‘다선은 바로 채씨의 『다록』에서 말한 다시라고 하는 것이다. ’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퇴계가 말하기를,“다선은 대나무로 만든다.” 하였다.
丘儀按本註 主婦執茶筅蘇典切點茶 蓋先設盞托至是乃注湯于盞 用茶筅點之 古人飮茶用末所謂點茶者 先置末茶於器中 然後投以滾湯點以冷水 而用茶筅調之 筅之制不見於書傳 惟元謝宗可有茶筅詩 此君一節瑩無瑕 夜聽松風漱玉華 萬縷引風歸蟹眼 半甁飛雪起龍牙 其形狀彷彿見矣 今人煎茶葉 而此猶云點茶者 存舊也 或謂茶筅卽蔡氏茶錄所謂茶匙 非是 退溪曰筅以竹爲之.
민간에서는 차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흔히 차례 지낸다는 말이 있듯이 민간에도 이러한 문화가 전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긴 합니다.
이러한 제사 의례 말고도 다른 방면에서도 차는 사용되긴 하였습니다. 잡동산이(雜同散異)를 보면 혼례 때에도 차와 관련된 의례가 기록 되어 있는데, 이 중 납채문명(納采問名)의 의례 때 사당에 차례를 지냈다고는 합니다.
또 민간에 전승된 민요를 보면 이와 차와 관련된 백성들의 믿음을 볼 수 있다.
영축산록 자장골에 자장율사 따라왔던 자장암의 금개구리 차씨한알 토해주소 우리딸년 시집갈 때 봉채집에 넣어주어 떡판같은 아들낳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것이 차가 나는 지방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차씨를 가져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붙이자면
조선사 전반을 봤을 때 조선은 승유억불의 표어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실행에 있어서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편적으로 특정 시기에 왕실에서 불교를 믿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유적들을 통해서 이해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선 시기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성 안에 절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지만, 대신 경기도 지방에 많은 절들이 생겼습니다.
이는 당시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사대부층에서 불교를 믿는 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라고 봅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많은 절들의 복구가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지배층과 백생들 또한 불교의 영향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특정 인물들 대표적으로는 정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엄격한 유교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승유억불을 엄격하게 진행하고자 했던
제가 모르는 사료들이 있을 수 있으나 조선사 전반적으로 승유억불은 엄격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차는 승유억불과 관련이 없습니다. 조선 시기에 차는 선비들을 주축으로 차 문화를 발전 시켜왔고 선비들은 이를 소박함과 결부하여 차를 마셨습니다.
이는 논어 학이편에서 말하는 안빈낙도의 정신에 들어 맞는 식품이었으며, 차는 검소함의 상징으로서 소비되었습니다.
또한 차는 공물의 일종으로서 납부 되기도 하였습니다.
승유억불이 사찰의 차 생산을 억제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지금도 유명한 녹차 산지들 하동, 보성 등지에서 차는 꾸준히 제배 되었고,
공납차 이외에도 시중에서 차가 꾸준히 유통 되었기에 승유억불이 조선의 차를 억재하고 배척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더 관심이 있으시면 박영식. "조선시대 茶産地와 貢納茶에 관한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圓光大學校, 2015. 전라북도 을 참조하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예전에 쓴 글을 복사 붙여넣기 하면서 쓴 거라 맥락이 이상하거나 해도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양물과 기호품은 다음편에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거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tea&no=393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