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튀르키예에서 인사드립니다. 메르하바!
올해 겨울은 평년보다 따뜻하게 보내는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는 내륙지방이라 겨울에 -20도 정도는 우습게 떨어지고 11월부터 4월까지, 심지어 딱 한 번 5월초에도 눈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올해는 따뜻하네요. 북,중유럽은 이상고온이라던데 여기도 영향을 받는것 같습니다. 바다건너 우크라이나쪽에서 오는 찬바람도 올해는 이상하게시리 조용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에게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제 찻잔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의견에 대한 답의 의미로 오늘은 제가 가지고 있는 찻잔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침 오늘 여자친구도 오고, 손님이 몇명 와서 컵보드에 장식용으로 넣어놓던 찻잔들을 꺼낼 기회가 있었는데, 손님들 다 가고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
제가 보유하고 있는 홍차 찻잔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유리잔들은 러시아와 여기 물건들입니다.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윗사진의 9시 방향의 꽃무늬 있는 찻잔부터 시작해서 시계반대방향 순서입니다.
1. 웨지우드, Charnwood 패턴, (1951-1987년 사이 생산, 이 찻잔은 1950년대 웨지우드 스탬프가 있음)
2. 로얄 알버트, Silver maple 패턴 (1959-1984 사이 생산, 년도 불명, 전 주인 말로는 1974년에 구입했다고 함)
3. 로얄 우스터,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기념 한정판 찻잔 (2012년)
4. 영국 스태퍼드셔 생산, 브랜드 불명 본차이나 잔 (바닥 스탬프의 숫자에 따라 셀러는 1943년 생산으로 추측)
5. 소련 홍차용 유리잔 + 빳스따까닉 (1990년 이전)
6. 튀르키예 파샤바흐체 유리찻잔 + 아제르바이잔 예술가가 손으로 그린 그림장식 (2021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구입)
먼저 Wedgwood Charnwood 찻잔입니다. 재질은 본차이나이며, 웨지우드 특유의 형태가 1950년대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입구가 넓어서 차향이 잘 퍼지고, 또 빠르게 식습니다. 영국인들은 이런 입구 넓은 잔을 선호하는거 같은데,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던 대답은 대체로 "뜨거운 차를 어떻게 마시냐?" 아니면 "차가 뜨거우면 후루룩거리기(slurping) 마련인데 이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다." 라고 하더군요. 애초에 영국인들이 밀크티를 마실때, 뜨겁게 데운 우유가 아니라 실온보관 우유를 쓰는 이유도 이 "후루룩거리지 않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알고 있습니다.
잔의 디자인은 시누아즈리(중국풍)를 차용한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중국 분채자기스러운 느낌이 풍기지요. 찻잔에 장식된 붉은꽃은 영국에 없는 모란꽃으로 보입니다.
이 잔은 귀족적이고, 우아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얼그레이같은 가향차를 마실때 향이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심각한(?)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손잡이가 너무 작습니다. 뭐랄까... 예절주입기 같은 느낌의 손잡이입니다.
영국식 찻자리 예법에 의하면 차를 마실때 한 손으로는 찻잔받침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찻잔을 잡되 엄지, 검지로 찻잔 손잡이를 꼬집듯이 잡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손잡이 아래를 받쳐야 합니다. 19세기에만 해도 이렇게 찻잔을 잡고, 새끼손가락은 찻잔 반대방향으로 뻗는것이 우아한 자세라고 선호되었지만 21세기인 지금와서는 고상한척 한다(posh)는 놀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윗사진을 보면 이 찻잔을 올바르게 잡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손잡이 고리에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기때문에 좋든 싫든 그렇게 잡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절주입기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ㄲㄲㄲ
요즘은 이렇게 예법에 따라 찻잔을 잡는 사람들을 보기 쉽지 않지만, 아직도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영국 왕실과 귀족들은 이 찻잔잡기를 고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영국에서는 "고상한 사람들은 찻잔을 세 손가락으로 잡고, 평민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잡는다." 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평민출신인 캐서린 미들턴 웨일스공비가 이 잡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까이기도 합니다. (링크) 이 기사를 보면 전통예법대로 찻잔을 잡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대조시키면서 웨일스 공비를 근본없다고 까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아무튼 이 웨지우드 "예절주입기"를 사용하시면 매우 귀족적이고, 우아한 전통예법대로 찻잔을 잡는 법을 손쉽게 숙지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잔은 Royal Albert의 Silver maple 패턴 잔입니다. 로얄 알버트는 황실장미 무늬가 유명하기도 하고, 화사한 디자인이 많지만 이건 상대적으로 무채색인데 제가 가지고있는 실버 티셋과 어울릴거 같아서 케이크접시까지 포함된 트리오로 4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잔은, 위의 웨지우드 "예절주입기" 보다는 쓰기 쉽습니다. 이 잔도 입구가 넓지만 높이가 높아서 균형이 잘 맞으며, 찻물의 온도도 웨지우드보다는 천천히 식는 느낌입니다. 입구의 림이 얇지만 위로 쭉 뻗어있기 때문에 마실때 후루룩거리는 소리가 덜 나는것도 장점입니다.
세번째 잔은 Royal Worcester의 특별한정판 잔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발매한 찻잔인데 영국왕실의 문장과 함께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4개 왕국의 상징 꽃(잉글랜드: 장미, 스코틀랜드: 엉겅퀴, 웨일스: 수선화, 아일랜드: 클로버)을 테마로 장식되어있습니다.
이 잔은 처음 보여드린 웨지우드잔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웨지우드 "예절주입기"보다 손잡이 고리가 커서 손가락을 넣고 잡아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용량이 조금 더 커서 손이 큰 제가 쓰기에는 다른 잔들보다 더 편해서 선호하는 잔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여왕님이 가셔서 이 잔도 역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 철수 왕이랑 관련된 굿즈들이 나오겠지요.
끝으로 영국산 잔 마지막입니다. 이 잔은 골동품인데, 바닥에 브랜드명도 없고, 디자인은 묘하게 현대적인 잔입니다. 심지어 전통적인 영국식 홍차잔이라기보단 커피잔에 더 비슷한 느낌입니다. 일단 금장 장식이 되어있고, 손으로 그렸다는 것은 알것 같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에든버러의 빈티지샵 주인장은 밑의 스탬프를 보면 2ㅊ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에 만들었을거라는 추측을 했는데, 아마 전쟁통에 찻잔, 커피잔 구분없이 만들라는 요구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사기는 찻잔으로 샀지만, 사실 저는 커피잔으로 더 자주 씁니다. 잔이 좁고 높아서 잘 식지 않고, 오히려 커피마시기에 더 좋은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유리잔입니다. 러시아인들은 동네가 추워서 그런지 빨리 식는 영국식 찻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로모노소프같은 러시아 도자기 찻잔들을 보더라도 벽의 두께가 영국식 얇디얇은 본차이나와는 눈에 확 뜨일정도로 두꺼운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유리잔도 마찬가지로 빨리 식지 않기 때문에 사모바르와 함께 러시아인들이 선호하는 차도구입니다.
이 유리잔은 조지아 트빌리시에 있는 벼룩시장에서 구입했는데, 소련시절의 물건입니다. 바닥에 가격 8코페이카라고 러시아말로 새겨져있지요. 주름무늬가 있고 벽이 매우 두꺼운 전형적인 소련식 유리잔이고 현재도 꾸준히 생산되고 있습니다. 비단 러시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등등 구소련권 국가에서는 여전히 많이들 쓰는 잔입니다. 이 잔은 맨손으로 잡기 어렵기 때문에 빳스따까닉(подстаканник, 잔 밑에 있는 것)이라는 홀더를 사용합니다. 소련시절에는 이 빳스따까닉이 국영 콜추기노 비철금속 가공공장이라는 곳에서 독점생산되었는데 소련의 국경일이나 각종 기념일, 행사기념, 각 도시의 상징 등을 넣어 다양한 시리즈로 발매했기 때문에 이걸 수집하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가령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들어가있는 빳스따까닉이나 소련의 낫과 망치가 들어간 디자인은 아직도 스테디셀러 취급받고 현재도 기념품으로 팔립니다.
이 빳스따까닉은 여행중에도 유용한데, 위 사진을 보면 유리잔과 빳스따까닉 사이에 유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겁니다. 이 유격때문에 덜컹거리는 기차나 자동차 안에서도 차를 쏟지 않고 티타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같은 러시아 기차를 타면 이 잔과 빳스따까닉을 빌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여기 튀르키예식 찻잔입니다.
이 잔은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의 합작품입니다. 잔 자체는 튀르키예 최대의 유리제조기업인 파샤바흐체(Paşabahçe)에서 생산했지만, 위의 그림장식은 아제르바이잔 화가가 손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아제르바이잔 구시가지의 모습과 불꽃을 상징하는 전통문양인 부타(Buta)로 장식된 잔입니다. 허리가 잘록해서 튀르키예에서는 가는 허리 잔(ince belli bardak, 인제 벨리 바르닥)이라고 부르고,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서양배 모양의 잔(armudu stəkan, 아르무두 스태캰)이라고 부릅니다.
이 잔은 역시 뜨거운 차를 좋아하고, 식은 차를 극혐하는 이동네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의 차문화도 사모바르(차이단륵)+유리잔 문화인데 허리가 잘록하기 때문에 차의 온기가 오래 유지된다고 합니다.
이 잔은 초심자들이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길 찾아오는 한국분들도 처음에는 이 잔 잡기가 힘들었다고들 하더군요.
이 잔은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위 사진처럼 윗부분의 태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엄지와 검지로 찻잔의 입구 테두리를 잡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면 되지요. 때문에 이 잔에 차를 따를때는 "입술의 자리" (dudak yeri)라고 불리는 빈공간을 남겨야합니다.
이외에도 잔이 몇종 더 있긴 하지만, 기능적으로나 형태적으로나 기존에 소개한 잔들과 모두 겹치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인 댓글에서는 제게 어떤 잔이 좋은 잔인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느쪽이 좋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각각의 잔이 다 필요하고, 또 쓰게 되거든요. 가령 겨울에는 저도 러시아식 혹은 튀르키예식 유리잔을 더 선호하고, 여름에는 웨지우드 잔같이 빠르게 식는 잔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식 스트레이트 홍차도 좋아하지만 밀크티도 좋아합니다. 차에 레몬을 띄우고, 잼과 함께 먹는 러시안티나 사프란, 정향, 오레가노같은 향신료를 넣고 우리는 아제르바이잔-페르시아식 홍차도 좋아합니다.
튀르키예꿀주먹 ㄷㄷ
한국사람들 중에선 지금까지 나보다 손 큰 사람을 못봤음. 튀르크인중에서도 지금까지 딱 두번 봄. :(
이거 왜 념글안감?
추천 3개 이상에 어느정도 댓글이 달려야가는거 아닌가 싶음.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댓글 두어개 더 달리면 갈듯.
예상이 맞네. 내가 쓰지 않은 댓글 4개 에 추천 3이상이 이 갤 념글 조건인거같음.
찐 영국방식은 받침에 차를 따라마시는거 아님??
그건 한 300년전 이야기 ㄲㄲ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여름/겨울마다 나눠 쓰거나 찻잔마다 맞는 차 찾는 것도 재밌겠네요.
저는 주로 홍차를 마시기 때문에 홍차잔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녹차는 동양식 잔을 쓰거나 빨리 식으라고 유리컵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