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인스턴트
비 오는 초여름 저녁이었다. 작은 시골역은 이미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조금씩 조용해지고 있었다. 플랫폼 끝에는 오래된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회색 코트를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김도현이었다. 그는 매주 수요일이면 이 역에 왔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였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역무원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역 앞 문구점의 어린 학생 하나만은 궁금해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민우였다.
어느 날, 민우는 용기를 내어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누구 기다리세요?”
노인은 잠시 웃었다. 아주 조용한 미소였다.
“응. 약속이 하나 있거든.”
“언제 오는데요?”
노인은 플랫폼 끝 어둠을 바라보았다.
“아마… 곧 올 거야.”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묻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 민우는 수요일마다 숙제를 들고 역에 와 노인 옆에 앉았다. 노인은 말이 많지 않았지만, 민우가 묻는 것에는 늘 차분히 답했다.
계절이 바뀌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민우는 키가 조금 자랐고, 노인의 머리는 조금 더 희어졌다.
어느 날 민우가 물었다.
“할아버지, 그 사람… 정말 오긴 와요?”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올지 안 올지는 나도 몰라.”
“그럼 왜 기다려요?”
노인은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약속했거든.”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전, 이 역은 지금보다 훨씬 붐볐다. 젊은 군인이었던 도현은 이곳에서 한 사람과 헤어졌다.
그 사람은 그의 약혼자, 지연이었다.
도현은 전4쟁터로 떠나야 했다. 지연은 울면서 말했다.
“살아서 돌아오면… 여기서 다시 만나자.”
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전4쟁은 길어졌다. 도현은 살아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세상은 많이 변했다.
지연의 가족은 다른 도시로 떠났고, 연락은 끊겼다.
도현은 몇 번이나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매주 오는 거예요?”
민우가 물었다.
“응. 혹시라도 돌아올까 봐.”
민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 왔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도현은 역에 와 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숨도 조금 가빴다.
민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그냥 집에 가요.”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꼭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민우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옆에 앉아 있었다.
밤이 깊어졌다.
마지막 열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내렸다.
그리고 그중에 한 여자가 있었다.
흰 머리의 노인이었다.
여자는 플랫폼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치 오래된 기억 속 장면을 확인하듯이.
그러다 벤치를 보았다.
그리고 멈췄다.
“도현…?”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도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연…?”
여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나… 너무 늦었지.”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연이 말했다.
“돌아왔는데… 당신이 없을까 봐… 몇 번이나 망설였어.”
도현은 조용히 웃었다.
“괜찮아.”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약속 지켰잖아.”
지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민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두 노인은 손을 잡은 채 벤치에 앉았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민우가 다시 돌아봤을 때, 벤치에는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지연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저 사람… 잠깐 잠든 것 같네.”
하지만 민우는 알고 있었다.
도현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을 끝낸 사람처럼.
그 이후로도 민우는 종종 그 역에 갔다.
벤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그 벤치 위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 내리는 저녁이면 특히 그랬다.
마치 오래된 약속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는 것처럼.
3.1 pro
명동의 좁은 골목 끝, 낡은 간판을 단 '최씨 공방'에는 언제나 미세한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맴돌았다. 예순을 훌쩍 넘긴 최 노인은 망가진 오르골과 시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장인이었다. 그는 사람과 말을 섞기보다 차가운 금속 태엽과 대화하는 것을 더 편안해하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어느 비 오는 늦은 오후, 앳된 얼굴의 젊은 여자가 공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게 그을린 나무 상자가 안겨 있었다.
"이 오르골… 고칠 수 있을까요?"
여자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최 노인은 말없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화재 속에서 간신히 건져낸 듯, 나무 케이스는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고 안쪽의 황동 실린더와 금속 빗장(Comb)은 열에 녹아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평범한 수리공이었다면 단번에 고개를 저었을 참담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유품입니다." 여자가 덧붙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불길 속에서도 이것만은 꼭 찾아달라고 하셨어요. 이 안에서 나던 소리를… 꼭 한 번만 다시 듣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최 노인은 돋보기 너머로 뒤틀린 태엽을 한참 바라보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좀 걸릴 겝니다."
수리 작업은 길고 고단했다. 그는 녹아내린 톱니를 하나하나 새로 깎고, 불에 타버린 금속 빗장을 두드려 다시 음계를 맞췄다. 소리를 알지 못하니 오직 실린더에 박힌 미세한 핀들의 배열만으로 본래의 멜로디를 유추해 내야 했다.
수리가 막바지에 다다른 밤, 최 노인은 마침내 끊어졌던 태엽을 연결하고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팅-, 티링-, 팅-
어설프게 조율된 금속음이 공방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불규칙하고 둔탁한 소리였지만, 그 선율이 귓가를 스친 순간 최 노인의 굵은 손마디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다시 한번 태엽을 감았다.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명한 클래식도, 흔한 동요도 아니었다. 30년 전, 갓 태어난 딸을 품에 안고 밤새워 직접 작곡해 만들어주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장가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낡은 공방의 먼지 냄새가 싫다며 모진 말로 그의 가슴에 못을 박고 집을 떠났던 딸. 그 후로 단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던 그의 외동딸이었다. 불에 타 흉측해진 오르골 위로 최 노인의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며칠 뒤, 여자가 다시 공방을 찾았다.
최 노인은 묵묵히 윤이 나는 새 나무 상자에 담긴 오르골을 내밀었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태엽을 감자, 맑고 영롱한 자장가가 공방을 가득 채웠다. 여자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오르골을 가슴에 품었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이 소리를 그리워하셨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낡은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최 노인에게 건넸다.
"어머니가 남기신 편지예요. 이 오르골을 만든 장인을 찾게 된다면,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자장가 덕분에 지치고 힘든 날에도 매일 밤 따뜻하게 잠들 수 있었다고, 그리고… 너무 늦게 돌아와서 죄송하다'고요."
여자는 눈물이 고인 채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최 노인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대신해 인사드릴게요. 다녀왔습니다."
오르골의 맑은 태엽 소리가 멈춘 뒤에도, 공방 안에는 오랫동안 끊어졌던 시간들이 다시 맞물려 돌아가는 따뜻한 울림이 가득했다.
뭐가 더 낳냐 ?
인소랑 베스트셀러의 체급차이가 나는걸..난 3.1pro
난 3.1 pro가 중간에 뭔말하는지 모르겠던데 표현만 좀 더 화려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