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뇌화로 지금의 자아를 유지한 채 영생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

아마 기술적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어떤 초콜릿 보다도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물과 법칙에는 양면성이 있기에 이토록 달콤한 초콜릿에도 쓴 부분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자아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주로 인용하여 설명된다.

이 역설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테세우스라는 젊은이가 몰고 온 배를 보존하기 위해 낡은 부분을 새로운 목재로 교체하며 1천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니 결국 테세우스가 사용했던 부분이 단 한 부분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전혀 별개의 배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역설이다.

이걸 전뇌화에 인용하게 되면, 전뇌화라는 작업을 거쳐 내 뇌가 서서히 기계로 교체되고, 마침내 내 뇌가 온전히 뇌의 역할을 하는 기계로 바뀌었을때 유지되고 있는 나의 정신은 나인지, 혹은 나처럼 생각하는 기계인지에 대한 물음이 된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에 따라 물질적인 부분의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 라고 규정할 수 없다고 하면, 나를 규정하는 것은 그간 내가 살아왔던 정보의 집합체를 나라고 규정해야 하는가?

여기서 암 말기에 접어들어 죽기 직전의 상태인 당신의 뇌를 컴퓨터 속에 업로딩했다고 가정해보자. 업로딩이 끝나고 마인드 업로딩한 나는 컴퓨터 속에서 먼저 업로딩한 친구들과 함께 무한히 넓은 들판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업로딩 된 나는 온전히 나 일 것이다. 암에 걸려 죽기 직전인 상태에서 마인드 업로딩 한 상황까지 모조리 알고있는 나 자신. 그러나 생물학적인 나는 병상의 침대에서 쓸쓸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죽어가고 있다. 결국 정보조차 온전히 나를 나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적 개념에서 보면,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나이다. 뇌가 인지하고 있는 매 순간순간이 나이고, 1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인간의 자아는 연속성으로 유지되지만 연속되는 모든 순간 순간을 개별적으로 놓고 보았을때 그것들 전부를 온전히 나라고 규정 할 수 없다. 오직 기억이라는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책이 있을 뿐이다.

나라는 존재를 유지해왔던 연속성이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아는 물질이나 정보가 아닌 대상으로써 규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뇌의 전체가 기계로 대체된 나 던지, 뇌가 모조리 온전한 나 던지, 결국 나를 정의하는 것은 스스로가 아닌 두 존재가 가진 정보가 대상으로써 인식 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주체는 대체 무엇인가? 결국 나 자신은 나니까 나야! 라고 규정하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허무하지 않나?

결과적으로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테세우스의 배 스스로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닌, 그 배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 주체의 관찰방법에 대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