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후반이었을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글이 아직도 생각난다.
'시계를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
'금일이라는 말을 모르는 MZ'
지금 생각하면 참 부질없는 것으로 열심히 싸웠던 것 같다. 휴대폰 시계가 시간을 다 알려주는데, 왜 굳이 시계를 읽어야하는가? 그리고 금일이라는 단어는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그런걸 굳이 머리에 넣어두어야하는가? 당시의 나로써는 꼰대기질이 앞섰는지, 저런 무식(?)을 용납 못했던 모양이다.
2020년대 중반에 터진 인공지능 혁명은 우리가 생각했던 지식의 범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전에는 원하는 결론을 얻기위해 많은 것들을 머리에 넣어야했지만, 이제는 인공지능 사용법만 알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계나 금일따위는 알아야할 이유도,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2020년대 중반에 태어난 아이들은 인공지능과 함께 살고, 자라났다. 사회는 이 아이들을 뉴피플(마치 뉴 노멀과 피플을 합친 것 같다.)이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을 뉴피플은 배우지 않았다.
뉴피플은 예전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먼저 접하였듯이, 인공지능을 먼저 접하였다. 스마트폰은 한방향으로만 소통을 하지만, 인공지능은 양방향으로 소통하니 아이들의 인지적, 정서적 발달에는 더 없이 좋았을 것이다. 광고에서 했던 말들은 오히려 과소광고였다고 생각한다.
뉴피플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때는, 학교는 유치원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직업이 사라지는 마당에 학교가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나도 그 시점에 다니던 학교로부터 권고사직을 받았던것 같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권고사직 이후로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생존을 위해 돈을 벌필요도 없었고, 원하는것은 대게 충족되었다. 아둥바둥 거릴 필요가 없었다. 남는게 시간이었다. 그래서 취미를 시작했었다. 예전부터 조각에 관심이 있었기에 디지털 조각을 취미로 삼았다. 방 하나에 큰 AR덩어리를 설치하고, 디지털 칼로 조금씩 깎아 나가면 된다. 마그네틱 기술과 진동기술의 절묘한 조합으로 작은 칼이 대리석을 깎는 듯한 느낌을 구현했다고 한다. 결과물이 형편없긴 해도, 성취감은 장난 아니다. Pietà를 조각했을때는 1년이 걸렸던것 같다.
잡설이 길었던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뉴피플중에 노력이라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들은 원하는 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세대이다. 뉴피플은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쥐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를 쥐는 세대이다. 머리를 굴려서 문장을 만들어봐야, GPT-S(Sentence)가 쓴 글이 훨씬 보기 좋다. 소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일'필요가 전혀 없다. GPT-R(Read)이 대신 듣고, 의도를 분석한 다음에 적당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최선의 결과가 정해져있는데, 선택지는 주는것이 예전부터 이상해서, 과거 문서를 찾아보니 GPT의 예전 CEO인 샘알트만의 원칙이라고 한다.
뉴피플은 감정조절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인공지능과 24시간 붙어지내면서 소통을 했으니 그럴만도 한데, 인공지능은 결코 화내는 법 없이 뉴피플을 설득하고 공감해준다. 뉴피플은 인공지능의 소통방식을 따라하는 것이다. 어쩌면 싸움을 반복하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뉴피플은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공감할줄은 모르는것 같다. 뉴피플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잘 이해한 것 같은데, 그 감정을 본인이 느끼지는 못한다. 공감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행위인데, 가슴이 감정을 느껴야할 상황에, 인공지능에게 상황을 이해시켜달라고 말해버린다. 머리가 이해해버리니 가슴은 필요없는 것이다.
꼰대같은 말을 하자면, 뉴피플에게는 '시간'과 '감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뉴피플에게 지식은 충분하다. 모르는 정보가 생겨나도, 인공지능이 잘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라는 바다에서 사는 존재이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글을 쓰는 행위는 표현의 수단을 넘어선 자기인식활동이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스스로 깨닫는 행위인 것이다. 이 행위는 오랜시간 천천히 이루어지지만, 나를 그리고 삶을 알아가는 중요한 활동이다. AI로 그림을 '만드는' 활동을 낮잡아 볼 생각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을 복사해서 그려넣는것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알아가는 활동이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피카소의 망상이 아니라 피카소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손가락을 몇 번 놀려서, 화려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림을 뽑아내는것은 자기만족일 순 있어도,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권장될 일은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림 '그리기'는 분명 가치 있는 활동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분노가 무의미한 활동인 것은 맞지만, 지나치게 감정이 절제된 삶은 색 없는 꽃과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감정은 분명 있을 것이다. 감정을 표출할 기회가 적었던 것은 아닐까? 성취뒤의 기쁨, 상실뒤의 슬픔 같은 기회가 더 많아진다면, 이들의 삶은 더 다채로워 질 것이다.
시간을 오래 들여야 성과가 나오는 취미생활을 추천하고싶다. 나는 디지털 조각을 했지만, 이건 골이따분한(무슨 뜻인지 알고싶다면 직접 찾아보자.)과정이고, 중간중간에 성과를 조금씩 확인할 수 있는 노래'부르기'를 추천한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분명히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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