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인생에 사랑할만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던 것 뿐임

나는 특이점 주의를 진지하게 검토한 그 시점부터 원래 좋아하던 내 전공을 오히려 더 좋아하게 됐음
미래의 커리어 걱정이나 유학이나 이런 방법적인 고민을 좀 내려놓고 순수하게 하고싶은 공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돈이나 노후대비 같은 목표를 쫓기보단 인류의 자연지능이 인공지능을 압도하는 과도기 동안만큼은 내가 내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소박하지만 자아실현을 좀 더 지향하는 계획또한 세울 수 있게 됨

특이점 때문에 의욕을 잃었다면 그 잃어버린 의욕이란 건 뭔갈 성취하고 싶은 긍정적인 의욕이 아니라 그냥 바닥을 치고 싶지 않아서 몸부림 치는 거일 뿐이고
그런 애처로운 몸부림을 의욕으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함

관성에 따라 인생을 보내고 있었기에 의욕을 잃은 것이지. 헌데 그 잃었다는 의욕은 애초에 의욕이 아니라 그 본래적인 기원은 공포고 불안임.

생각해봐 내가 제육볶음을 겁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특이점 이후에는 완몰가에서 이베리코 돼지고기로 만든 제육볶음 100인분도 먹을 수 있으니까 지금 집 앞 분식집에서 파는 싸구려 제육볶음에 대한 내 생리적 욕구도 시들해짐?

당장 좋아하는 이성이 있는데 어차피 특이점 이후에는 모델이나 연예인급 이성들이랑 삼다리 네다리 연애도 가능하니까 좋아하는 애한테 관심이 확 식어?

좋아하는 음악장르가 있는데 특이점 이후에는 어차피 내 욕구에 딱 맞는 맞춤형음악을 ai가 수백 수천개 즉시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 스트리밍 서비스 끊고 걍 특이점 올때까지 존버하면서 고요속에 살고싶어져??

아닐 걸?

진짜 의욕은 욕망에서 나오는 거지 불안에서 나오는 게 아님 그리고 특이점주의를 안다고 해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본인은 의욕이라고 착각한 불안과 공포밖에 없는 인생이었고, 특이점 이후에는 그런 불안의 원천 자체가 아예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지금의 투쟁과 고생이 허무하게만 느껴진다면

그런 인생은 선형주의자든 특이점주의자든 애초에 실패야
  
물론 환경적인 이유로 애초에 인생에 행복을 주는 무언가가 거의 없고 그런 실패한 인생을 사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게 본인 탓은 아니지만 그걸 특이점주의의 탓으로 돌릴 것은 아니라고 봄

선형주의를 믿어서, 그리고 선형주의자들이 예측한 미래가 맞아서, 그 '의욕'이란 걸 앞세워서 어찌저찌 삶을 쥐어짜고 쥐어짜서 성취를 이루고 평균적인 인생의 경로를 따라가게 된다고 해도
  
어차피 인생에 뭔가 애착을 둘 게 없고 진짜 의욕이란 걸 내기 힘든 상황이라면 눈 감을 때쯤 '아 이번 인생은 정말 좆같았다' 말고 달리 말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