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은 낡은 기차역 플랫폼에 내려섰다. 가을 끝자락의 공기는 빛바랜 책장 사이를 흐르는 먼지처럼 건조하고 차가웠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삐걱거리는 버스 정류장 간판, 녹슨 대문, 그리고 서늘한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포플러나무. 모든 것이 희미한 과거 속에 잠긴 듯 보였지만, 그의 기억은 아직 선명했다. 마을에는 어릴 적부터 성민을 특별히 아껴주던 할아버지의 헌책방이 있었다. 주름진 손으로 책등을 닦으며 “책은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 같은 것”이라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미소가 떠올랐다.

길 모퉁이를 돌아, 작은 흰 담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헌책방의 간판이 어스름한 불빛 아래로 드러났다. ‘혜빈서재’라는 고풍스러운 글씨는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성민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문손잡이를 당겼다. 삐걱 소리와 함께 익숙한 종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마른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오래된 지식과 기억의 결이 섞인 공기가 성민의 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안쪽 조그만 탁자에 한 노인이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생전 보지 못한 이방인.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초점 잃은 눈빛,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가녀린 손가락 끝에 책 한 권이 매달려 있었다. 성민이 다가가자,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성민은 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노인의 눈동자 속에는 깊은 우물처럼 그를 향한 인식이 고여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군.” 노인은 성민을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마치 오래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말했다. “할아버지 서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부친 손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성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노인은 낯설었지만, 그 어조나 풍기는 공기는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했다.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성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인은 책장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낡은 흔적들—좁은 난로 옆에 걸린 반질반질한 파이프, 연한 갈색 가죽으로 덧댄 장식장, 그리고 오래 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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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오래전 나와 인연을 맺었지요.”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책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한 페이지에 담아두고, 누군가는 그 페이지를 우연히 넘기면서 새로운 인연을 맺지요. 자네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 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이 책 속에는 자네 가족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하셨지요.”

성민은 의아했다. 가족의 비밀이라니. 그는 할아버지와 긴 시간을 함께 보내긴 했으나,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노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장을 가리켰다. 한 귀퉁이가 살짝 움푹 들어간 나무 책장, 그 속 한 칸에 유난히 빛바래고 두꺼운 책이 꽂혀 있었다. 성민은 조심스럽게 그 책을 끄집어냈다. 표지에는 어떠한 제목도 없이 갈색 가죽 표면에 깊은 흠집만 새겨져 있었다.

책을 펼치자 마치 오래된 나무 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짙은 향이 퍼졌다. 첫 장을 넘기자,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성민은 움찔했다. 사진 속에는 어릴 적 자신이 있었다. 잿빛 나무 뒤편에서 노란 나비를 따라가던 꼬마 성민, 그리고 그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할아버지. 그 옆에는 노인의 젊은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람도 있었다. 낯설지 않은 얼굴, 어딘가 익숙한 표정. 성민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기분을 느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족사 같은 짧은 글들이 나왔다. 할아버지의 필체로 추정되는 필사본은 “성민이에게”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문장을 읽자, 성민은 가슴이 턱 막혔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손자 성민이라면, 기억하렴. 우리의 시간은 한 곳에 고여 있지 않으며,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은 책장의 낱장처럼 서로를 뒤엉킨다. 네가 이 책을 피우듯, 또 다른 이는 네 기억 속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자네 할아버지는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남기고 가셨지. 그리고 그 마지막 페이지가 바로 이 서재야. 여기 있는 모든 책 속에 네 가족의 편린이 녹아 있고, 그 중에 네가 알아야 할 진실이 하나 숨어있지.” 성민은 무언의 물음표를 던지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지긋한 시선으로 성민을 향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자네 할아버지는 내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자네를 기다리리라 했네. 세상의 많은 책이 결국 하나의 운명을 향해 엮이듯, 우리 역시 그렇게 연결되어 있어.” 노인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다리로 가게 문쪽으로 향했다. 문 밖 어둠 속에서 그는 희미하게 번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사라졌다.

성민은 노인의 실루엣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든 책을 가만히 쥐었다. 책 속에서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세월이 흐른 뒤의 성민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담은 듯한 사진이었다. 자신이 언젠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서게 될 날을 예언하듯, 고요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낡은 헌책방 안에서 시간은 기묘하게 뒤얽혀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권의 책 속에서 교차하며, 사람의 운명은 책갈피 사이에 가느다란 실로 엮여 있는 듯했다. 성민은 책 속 한 문장을 다시 읽었다. “삶은 책과 같아,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었다 해도 그 여운은 다른 책 속에서 이어진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헌책방 문 밖으로 나섰을 때, 가을 하늘의 별빛이 유난히 맑았다. 성민은 여기에 다시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마을과 헌책방, 그리고 그 신비로운 노인을 기억하기 위해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성민은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이 서재의 또 다른 페이지를 넘기며,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렇게, 성민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삶이라는 책의 장(章)을 넘기며, 기억과 인연이라는 문장들이 새로운 페이지를 채우러 따라왔다.


잘쓰는거 같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