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봄. 벚꽃 잎이 운동장에 흩날리던 날, 소윤이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그 책은 우리 둘 다 좋아하던 만화였다. 소윤이 그 책을 건네줄 때의 부끄러워 살짝 붉어진 볼과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거 너 주려고 사왔어. 좋아할 거 같아서…."
소윤은 언제나 내 마음을 간파한 듯했다. 그 만화책은 이미 몇 번이고 같이 읽었지만, 새로 받은 이 한 권은 내게 특별했다. 표지엔 소윤의 손자국이 따스하게 남아 있었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녀가 곁에 있는 듯 달콤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더욱 소중히 그 책을 간직했다. 책장마다 소윤의 미소가 담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은 잔인하게도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는 법이다.
그날 오후, 양아치 아이들이 내 책을 빌리겠다고 다가왔다. 몸집 큰 아이가 팔꿈치로 나를 치며 말했다.
"야, 이거 좀 빌려줘라."
"아, 안 돼… 그거 소중한 거야…."
나는 작게 웅얼거렸다.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 나조차 듣지 못했다. 그들이 내 품에서 책을 낚아챘다.
"그래, 착하다. 너 그렇게 착하게만 살면 돼."
아이들의 비아냥거림에 내 안의 작은 용기는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들은 내 눈앞에서 책을 거칠게 넘기고 코를 후벼 파며 더러운 손으로 책장을 접어댔다. 마침내 한 아이는 펜을 꺼내 삐뚤빼뚤 낙서를 더했다. 이윽고 다른 아이들은 낙서된 책을 보고 조롱하며 내용을 더 망쳐놓았다.
"이딴 쓰레기 책 누가 보냐?"
어느새 아이들은 웃으며 만화책 페이지를 찢어 휴지처럼 써댔다. 나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내 소중한 추억이 망가지고 있었다. 소윤이 내게 주었던 진심이 더럽혀지고 있었다.
"자, 서비스 좋았지?"
아이들은 망가진 책을 내 얼굴 앞에 휙 던졌다. 그 순간 나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내게 무력함이란 이렇게 깊고 진한 수치였다.
나는 쓰레기처럼 구겨진 책을 들고 아무도 없는 학교 뒷골목에 섰다. 숨죽여 흐느끼다 분노가 치솟았다.
“젠장!”
무력한 나의 분노는 아무도 없는 골목 벽을 향했다. 나는 소리 지르며 책을 벽에 던졌다. 찢어진 페이지가 흩날리던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소윤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충격으로 흔들렸다. 나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져 무심코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딴 책 별로니까 그냥 버린 거야. 어차피 너도 속으로 날 비웃고 있잖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소윤은 내게 다가와 차분히 말했다.
"난…그렇게 생각 안 해."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는 오히려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분노와 모멸감에 휩싸인 나는 무심결에 소리쳤다.
"꺼져, 제발!"
소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걸어갈 때 나는 뒤늦게 후회로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몇 년이 흘렀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다른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소윤과 같은 고등학교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우연히 복도 끝에 서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더욱 맑아진 얼굴에 짙어진 눈빛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눈치를 채자마자 허겁지겁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숨죽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어떤 남학생이 그녀에게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걸었다. 소윤은 밝게 웃으며 그 아이와 지나쳤다. 나는 무너질 듯한 다리로 주저앉았다.
내 품속엔 그 더러워진 책이 아직도 품어져 있었다. 수없이 버리려고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추억의 흔적이었으니까. 그것을 버리는 건 소윤을 지우는 일 같았으니까.
나는 복도 구석에서 책을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미안해…."
후회는 언제나 늦게 찾아왔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책이 더러워진 게 아니라, 더러워진 건 나였다. 나의 연약함과 무력함이 그날 소윤의 마음을 더럽혔던 것이다.
소윤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을 주었지만, 나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내 스스로 소중한 사람을 내쳤고, 나의 가장 빛나던 기억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늦은 후회만이 남아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책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비록 더럽혀지고 망가졌지만, 추억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오직 내가 변했을 뿐.
그날의 봄바람과 함께, 소윤이 준 책 속의 맑았던 미소가 선명히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소중했던 추억은 아무리 망가져도 영원히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직 그걸 품었던 나의 마음만이 무너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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