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연과의 만남 이후, 내 일상은 이전과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평범한 학교생활의 궤도는 그대로였지만, 내 시선은 자꾸만 그 궤도 밖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서연.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서관 창가 자리에는 그녀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도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봄날의 짧은 꿈처럼, 혹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말들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경계선은 언제나 흐릿하지." "한쪽 세상만 보고 살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그 말들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안전하지만 답답했던 유리 상자에 생긴 균열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밝은 세계에 발을 딛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속한 듯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과 호기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방과 후였다. 딱히 할 일도 없어 교정을 거닐다 음악실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낡은 음악실은 방음이 잘되지 않아 간혹 연습하는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오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안이 비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합리적인 기대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나는 홀린 듯 음악실의 낡은 나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지가 희미하게 떠다니는 공간에는 낡은 피아노 한 대와 악보대 몇 개가 전부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역시 헛된 기대였나, 생각하며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지훈 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피아노 뒤쪽, 창가 구석의 그늘진 곳이었다. 그곳에 이서연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그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서연?" 나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도 네가 올 줄은 몰랐어." 그녀는 천천히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드러난 목선이 가늘고 하얗다. "그냥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어. 여긴 아무도 잘 안 오니까."

"나도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 어색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번에 했던 말 말이야…"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밝은 세상이랑 어두운 세상 이야기. 그게 무슨 뜻이었어?"

서연은 피식 웃었다. "글쎄.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일지도 모르지." 그녀는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 건반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아무 건반이나 하나를 꾹 눌렀다. 불협화음 같은, 그러나 묘하게 귀를 사로잡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쉽게 나누려고 해. 착한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상과 비정상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녀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입고 있는 그 교복처럼 말이야. 단정하고, 반듯하고, 모두 똑같아 보이지. 이게 네가 말하는 '밝은 세계'의 모습일 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 안에는 뭐가 있을까?" 그녀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 지루한 교복 아래에는, 사람들은 뭘 숨기고 있을까?"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그녀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향기가 짙어졌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궁금하지 않아, 지훈 군?" 그녀가 속삭였다. "이 단정한 교복 치마 아래에는, 어떤 색깔이 숨어 있을지."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서연 양무슨…"

"쉬잇." 그녀는 내 입술 위에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 네가 생각하는 '틀린' , '나쁜' 것이 정말 그런 건지."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교복 치마 앞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 시선은 자석에 끌린 듯 그곳으로 향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허벅지 위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교복 치마 아래 드러난 것은,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담하고 노골적인 디자인의 팬티였다. 얇고 속이 비치는 검은색 시스루 소재에, 복잡하고 화려한 붉은색 레이스가 아슬아슬하게 얽혀 있었다. 그것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농염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단정한 교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금지된 색깔이었다.

"…이게…"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다.

"어때?" 서연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했다. "이것도 나야, 지훈 군. 네가 몰랐던, 혹은 외면하고 싶었던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이지."

그녀는 천천히 치마를 내렸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목격한 강렬한 이미지는 내 망막에 그대로 새겨져 버렸다. 단정하고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 숨겨진 비밀스러운 욕망, 금지된 아름다움. 그것은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어두운 세계'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나도 모를 강한 흥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글쎄." 서연은 다시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자 짧은 치마 아래로 허벅지가 살짝 드러났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네 눈빛이 재미있어서. 넌 다른 애들이랑 좀 다른 것 같거든. 네 안에도 내가 말한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녀는 내 말을 끊었다.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니야. 그냥다른 거지. 네가 지금까지 배운 것과는 조금 다른 세상의 규칙일 뿐이야."

그녀는 피아노 건반을 다시 한번 눌렀다. 이번에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화음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어딘가 불안하고 위태롭게 들렸다.

"보고 싶지 않아, 지훈 군?"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네가 모르는 세상. 네가 두려워하는 세상. 하지만 어쩌면네가 진짜 원하는 세상일지도 모르는 곳."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위험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녀가 보여준 금지된 색깔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것은 혼란이었고, 두려움이었지만,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과 갈망이었다.

이서연. 그녀는 정말로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려는 걸까? 그리고 나는그 유혹에 기꺼이 넘어갈 준비가 된 걸까? 음악실의 먼지 쌓인 공기 속에서, 나는 대답 없는 질문만을 곱씹고 있었다. 내 평범했던 세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어 올린 치마 아래에서 본 그 강렬한 색깔처럼, 내 안의 무언가도 금지된 빛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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