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차가운 입맞춤처럼 뺨에 와 닿는다. 아니, 이것은 입맞춤이 아니다. 이것은 진짜 비다. 클럽 안의 열기와 인공 향기는 저 문 너머에 남겨두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현실 속으로 내던져졌다. 공기는 금속과 녹, 그리고 이름 모를 화학약품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아릿하다. 발밑에서는 물이 첨벙거린다. 웅덩이에 비친 네온 불빛이 수면 위에서 조각나 흩어진다. 보랏빛, 녹색빛, 핏빛. 마치 깨진 유리 조각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혹은, 유화 물감이 제멋대로 번져나간 듯.
심장이 뛴다. 너무 빠르고 강하게. 갈비뼈 안에서 새가 미친 듯이 날갯짓하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뛰지? 아, 도망치고 있구나. 무언가로부터. 무엇이었을까? 어둠 속의 붉은 눈동자들. 부서진 문. 푸른 스파크. 그리고… 내 손. 아직도 무언가를 쥐고 있다. 차갑고 단단한 것. 칼. 손가락이 저절로 그것을 꽉 움켜쥐고 있다. 놓아야 하는데. 무거운데. 하지만 손은 여전히 그것을 놓지 않는다. 마치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달린다. 다리가 멋대로 움직인다. 보도블록 위를, 웅덩이를 가리지 않고. 빗물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 차갑다. 몸이 떨린다. 추워서? 아니면… 두려워서?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에? 골목은 좁고 어둡다. 양옆의 벽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어 위압적이다. 축축한 벽에는 이끼 같은 것이 끼어 있고, 정체 모를 액체가 흘러내린 자국이 얼룩져 있다. 그 위로 AR 그래피티들이 희미하게 떠 있다. 뒤틀린 덩굴, 텅 빈 눈의 해골, 해독 불가능한 기호들. 그리고… 로고. 또 그 로고다. 차가운 금속 질감의 로고가 벽 위에서 희미하게 깜빡인다. 마치 숨겨진 메시지처럼. 왜 자꾸 보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사무실에서 나눠준 싸구려 기념품에 찍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니. 모르겠다. 생각하려 하면 머리가 아프다.
머릿속은 소용돌이치는 빛과 소리, 감각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그녀의 눈. 디지털 불꽃 같던 그 눈동자. VIP 룸의 차가운 공기. 그녀의 손길. 내 뉴럴 포트를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 그리고… 욱신거리는 통증. 혹은 고동. 그리고 붉은 눈들. 푸른 액체. 칼날의 섬광. 이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혼돈을 이룬다. 사무실의 풍경이 불쑥 끼어든다. 모니터의 하얀 불빛. 깜빡이는 커서. 김 대리의 굳은 표정. 서류 더미의 먼지 쌓인 냄새. 왜 이런 것들이 떠오르지? 이것은 지금의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 나는 이제 그곳에 없는데. 나는 지금 여기, 이 비 내리는 골목길을 달리고 있는데.
발이 엉킨다. 휘청. 벽에 부딪힌다. 거친 콘크리트 벽의 감촉. 어깨가 아프다. 하지만 몸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 달린다. 마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프로그램된 것처럼. 몸이 가볍다. 이상할 정도로.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드레날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저 앞. 골목 끝 모퉁이. 낡은 가게 쇼윈도우. 불 꺼진 가게 안쪽은 어둡지만, 쇼윈도우의 낡은 비디오 스크린은 켜져 있다. 화면 가득 노이즈가 지글거린다. 검고 흰 점들이 눈보라처럼 흩날린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주 잠깐, 무언가 다른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얀색. 부드러운 곡선. 토끼? 귀를 쫑긋 세운 하얀 토끼의 흐릿한 실루엣. 그것은 화면 노이즈와 뒤섞여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히 토끼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의 미소? 아니, 닮았지만… 뭔가 달랐다. 더 장난스럽고, 더… 기묘한. 화면은 다시 격렬한 노이즈로 뒤덮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충동이 일었다. 명확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나침반 바늘이 특정 방향을 가리키듯, 자연스럽게. 하얀 토끼. 따라가야 해. 저것을. 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 스크린이 있던 방향으로 향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는 것처럼. 그래, 가자. 저것이 무엇이든. 저것이 이끄는 곳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또 다른 골목. 더 좁고 어둡다. 양쪽 건물 벽이 더 높이 솟아 있어 하늘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타닥타닥, 머리 위 어딘가에 설치된 낡은 방수포를 때리는 소리가 선명하다. 저 멀리, 희미한 빛이 깜빡인다. 홀로그램 광고판인 듯하다. 역시 화면 상태가 좋지 않다. 노이즈가 심하고 색이 바랬다. 하지만 그 깜빡임 속에서, 다시 하얀 형체가 어른거린다. 토끼.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보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앞발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사라진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 빛을 향해. 등 뒤가 서늘하다. 누군가 따라오는 걸까? 빗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내 심장 소리 때문인지, 발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존재감.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시선. 혹은, 저 위, 어두운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드론의 차가운 눈. 돌아볼 수 없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달린다. 하얀 토끼의 잔상을 쫓아서. 이 미로 같은 골목길 속으로.
길가 노점상 앞을 지난다. 번쩍이는 크롬 의수나 중고 뉴럴 인터페이스 따위를 팔고 있다. 주인인 듯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그의 눈빛은 무심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그의 가게 앞에 세워진 AR 간판. ‘기억을 팝니다! 꿈을 삽니다!’ 그 글자들이 네온 빛 속에서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진다. 클럽의 홀로그램 댄서처럼, 혹은 사무실 프린터의 에러 메시지처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이제 다른 곳에 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저 하얀 토끼뿐.
웅덩이에 비친 내 얼굴. 빗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이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있다. 낯설고, 어쩌면 조금은 단단한. 손에 쥔 칼의 감촉이 다시 느껴진다. 차갑고, 확실한 존재감. 이것은 나를 지켜줄까? 아니면 나를 파괴할까?
저 앞, 공중에 떠 있는 작은 드론. 택배용인 듯하다. 그 옆면의 작은 스크린 위에서, 다시 하얀 토끼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훨씬 더 선명하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토끼는 짧게 깜빡이며 고개를 까딱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드론은 방향을 틀어 다른 골목으로 날아갔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드론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이성은 마비된 지 오래다. 남은 것은 오직 본능적인 이끌림뿐. 하얀 토끼가 이끄는 대로. 이 비 내리는 네온의 밤 속으로. 더 깊숙이.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 속으로. 발밑의 물웅덩이가 만들어내는 잔물결처럼, 내 의식도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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