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강철의 비 (Iron Rain)
"생존 확률 8.4퍼센트. 진입할까요, 대장?"
울하의 기계적인 음성이 브리핑 룸의 정적을 깼다. 알메인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식어버린 커피.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전면 스크린에는 지상의 참상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변방 개척촌 에그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루이나타 떼가 주민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비명소리가 스피커를 뚫을 듯 울렸지만, 알메인의 표정은 건조했다.
'너무 일러.'
지금 내려가봤자 흩어진 놈들을 하나하나 쫓아다녀야 한다. 그건 비효율적이다. 괴물들은 식사할 때 뭉치는 습성이 있다. 더 많은 피와 살점이 한곳에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생존자 47명... 38명... 29명...]
울하의 음성이 숫자를 읊었다. 사무적인 톤. 마치 재고를 세는 것처럼. 스크린 속에서 아이를 안고 뛰던 여자가 놈들의 발톱에 채여 넘어졌다. 뒤따라온 놈들이 그녀를 덮쳤다.
[21명... 14명...]
알메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잔인한 게 아니다. 이건 수학이다. 에너지와 인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최적의 타이밍. 5분. 10분. 스크린 속 생존자 아이콘이 하나씩 꺼져갔다. 알메인의 손가락이 머그잔 손잡이를 살짝 조였다. 찰나의 순간. 그것뿐이었다.
[...3명. 2명. 생존자 집계 중단. 유의미한 수치가 아닙니다.]
이윽고 놈들이 광장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시체 더미 위에서 만찬을 즐기기 위해. 포위망이 완성됐다.
[냉각수 살포 농도 정상. 은폐막 유지 중.]
알메인은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청소 시작해. 강하(Drop)."
'야근은 사양이니까.'
함선 하부가 열렸다.
에그림 마을의 하늘.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쳤다. 그 섬광에,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드러났다. 날개 없는 관(棺). 빛을 삼키는 흑회색 장갑. '세크톨 오르비온'.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포식자의 감각이 더 강대한 포식자를 감지한 것이다. 세 개의 어두운 점이 빗줄기를 찢으며 낙하했다.
콰아앙―!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강습 포드가 지면에 꽂혔다. 충격파가 동심원으로 퍼져나가며, 주변에 있던 괴물 대여섯 마리가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그것이, 괴물들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충격이 내장을 뒤흔들었다.
'우욱. 이놈의 관짝은 탈 때마다 멀미가 나는군.'
역추진 에나 분사―이 세계의 숨결이라 불리는 푸른 에너지―따위, 충격을 줄여주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계한 놈을 잡아다가 이 안에 처넣고 대기권 밖에서 던져버리고 싶다.
치이익.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포드의 해치가 열렸다. 알메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직이다. 먼저 나가는 건 언제나 육체파들의 몫이다.
"으으, 허리야."
통신기를 통해 미오멜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건 그녀였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좁은 포드에 구겨져 있었으니, 괴물보다 근육통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미오멜은 눈앞에서 침을 흘리는 루이나타의 머리통을 워해머 《골트》로 후려쳤다.
퍼억. 수박이 깨지는 소리. 아니, 그보다 더 둔탁하고 젖은 소리. 그 옆에서는 치르메리아가 우아하게 착지하고 있었다. 놈들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바람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 막을 형성해 오물을 튕겨내고 있었다.
"진흙이 튀었잖아요! 착륙 좌표 오차 수정 안 해요?"
치르메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쌍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괴물 세 마리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단면이 매끄럽다. 훌륭한 솜씨다.
미오멜이 전장을 '평탄화'하고, 치르메리아가 '마무리'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할당량을 채우듯 따로 또 같이 움직였다. 알메인은 그제야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 순간. 쿵, 쿵, 쿵. 지반을 울리는 진동이 다가왔다. 잔챙이들이 정리되자, 놈들의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채만한 덩치. 온몸에 돋아난 가시. 놈은 본능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적, 아니, 가장 늦게 문이 열리는 알메인의 포드를 향해 돌진했다. 육중한 앞발이 포드 입구를 내리찍으려 했다.
"귀찮게."
알메인은 한 손에 대검 《오디오 플리버》를, 다른 손에는 구겨진 멀미 봉투를 쥔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피하거나 막을 생각은 없다. 그저, 흘려보낼 뿐. 알메인의 몸에서 은비색 기류가 피어올랐다.
잿빛 성화, '염루(Flame Tear)'. 타오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 화염에 닿기 직전, 휘어져 비껴갔다. 물조차 저절로 피하는 불꽃.
괴물의 앞발이 알메인의 몸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지워졌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는지, 괴물은 잠시 멍하니 잘려 나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다.
"시끄러워."
알메인은 귀찮다는 듯 검을 가로로 그었다. 은비색 선이 허공에 그려졌다. 괴물의 방대한 몸뚱이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육체는 고운 회색 재가 되어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태우는 것이 아니다. 존재 자체를 소거하는 불꽃.
상황 종료. 알메인은 재가 된 잔해 사이를 걸었다.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아직 형체가 남은 가시 조각. 그는 무심하게 허리춤의 회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표본 하나. 본부 연구실이 좋아하겠군.'
그는 한숨을 쉬며 통신기를 켰다.
"착륙 좌표가 3미터 빗나갔어, 울하. 시말서 준비해."
[...생존자는요?]
울하의 물음에 알메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오멜이 무너진 집 잔해를 들추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손이 돌덩이를 치웠을 때, 그 아래서 작은 손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미오멜의 넓은 어깨가 한 번 떨렸다. 워해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돌아섰을 때, 그녀의 표정은 이미 평소와 같았다.
"...없어요, 대장."
굵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치르메리아는 손수건으로 검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미오멜의 등을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인간의 기척은 없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 이미 이곳은 지옥이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곤 지옥을 청소하고, 시체를 재로 만드는 것뿐.'
"없다."
알메인은 짧게 대답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공 강우가 쏟아지는 먹구름 사이로, 묵직한 칠흑의 관 같은 '세크톨 오르비온'이 희미하게 보였다.
'구원자라니, 웃기는 소리. 우린 그저, 뒷처리를 하러 온 장의사일 뿐이다.'
"복귀한다. 샤워하고 싶어 죽겠군."
알메인은 등 뒤의 폐허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통신기에 붉은 빛이 깜빡였다. 긴급 코드. 성기사단장 직통 채널. 알메인은 깊은 탄식을 삼켰다.
'야근 수당은커녕, 퇴근조차 허락되지 않을 모양이군.'
제2화: 그림자의 임무 (Shadow Mission)
삐- 삐- 삐-.
고막을 긁는 기계음. 그리고 시야를 점멸하는 붉은색 LED.
'긴급 호출. 즉, 야근 확정이다.'
방금 막 포드에서 내린 참이었다. 젖은 구두가 바닥에 닿으며 철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최악의 기분이다.
미오멜과 치르메리아는 벌써 장비를 벗어던질 태세였다. 샤워실로 직행하려는 저 가벼운 발걸음.
알메인은 축축한 구두로 바닥을 탁, 찍었다.
"동작 그만. 퇴근 취소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굳었다. 미오멜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돌아봤지만, 알메인은 무시하고 브리핑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들린 멀미 봉투를 쓰레기통을 향해 무심하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린 봉투는 쓰레기통 가장자리를 맞고 깔끔하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인.
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세크톨 오르비온의 브리핑 룸. 알메인은 낡은 소파에 흠뻑 젖은 채로 몸을 늘어뜨렸다.
찝찝하다. 빗물과 진흙, 그리고 에그림 마을의 먼지가 섞인 냄새.
'청소는 끝났다. 하지만 씻어낸 건 아무것도 없지.'
울하는 아직 제어실에서 센서 데이터를 정리 중일 것이다. 어차피 현장 투입 인원은 세 명이면 충분하다.
통신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연결 버튼을 눌렀다.
"샤워할 시간 5분만 주시지."
[유감이군요. 사안이 시급해서요.]
허공에 떠오른 홀로그램. 성기사단장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알메인의 몰골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상사 같으니.'
그녀는 즉시 데이터를 띄웠다. 제3방벽도시 '페룸'의 에너지 흐름도였다.
[현황입니다. 보시죠.]
알메인은 눅눅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래프를 힐끗 보았다.
공급량 곡선은 수평 유지. 반면 도시 내 잔존량 곡선은 바닥을 기고 있다.
복잡하게 볼 것도 없다. 1초면 충분했다.
"공급량은 정상인데 잔존량이 바닥이군. 파이프라인에 구멍이라도 났나? 아니면 누가 빨대 꽂고 훔쳐 먹고 있거나."
[정확합니다.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인 대규모 사용 기록은 전무합니다. 하지만 방벽의 출력은 위험 수위까지 떨어졌죠. 누군가 에나를 빼돌리고 있습니다.]
"그럼 정규군을 보내서 파이프를 조사하면 되잖아."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페룸의 영주는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어요. 우리가 공식 개입하면 내정 간섭이라며 반란의 명분이 될 겁니다.]
'귀찮은 정치놀음.'
결론은 뻔하다.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이 필요하다는 것.
[잠입해서 원인을 찾아내세요. 조용히, 그리고 흔적 없이.]
통신이 끊어졌다. 홀로그램이 사라진 자리에 정적만이 남았다.
알메인은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서 쇠 비린내가 났다.
"조용히라... 우리 애들한테 제일 어려운 걸 시키는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쉴 수 없다면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이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팀원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연기 수업 준비해. 장르 변경이다."
브리핑 룸 바닥에는 알메인이 창고에서 꺼내온 허름한 옷가지와 소품들이 널려 있었다.
전투 장비는 전부 압수다.
알메인은 연출가라도 된 것처럼 까다로운 시선으로 미오멜을 훑어보았다.
"자세가 너무 좋아."
"예?"
"넌 전사가 아니야. 평생 노동으로 골병든 짐꾼이지. 더 구부려."
알메인은 미오멜의 등에 묵직한 짐꾸러미를 얹어주곤, 그녀의 무릎 뒤 오금을 발로 툭 찼다.
미오멜이 휘청하며 자세가 무너졌다.
"그래, 그거야.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진 것처럼 걸어."
"으으, 대장. 이거 진짜 허리 아픈데요."
"그 신음 소리, 아주 좋아. 합격."
'근육 덩어리가 당당하게 걸으면 100미터 밖에서도 들킨다. 약해 보여야 산다.'
다음은 치르메리아. 그녀는 바닥에 있는 옷들 중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용병 복장을 고르고 있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드는 꼴이 가관이다.
알메인은 바닥의 먼지와 기름때를 손에 묻혔다. 그리고 치르메리아가 고른 옷을 낚아채 문질렀다.
"아악! 뭐 하시는 거예요!"
"빈민가에서 세제 냄새나는 용병은 없어."
치르메리아가 한 발 물러섰다.
"잠깐만요, 대장. 차라리 전투가 나아요. 이건 정말―"
"입어."
"최소한 안쪽에 깨끗한 속옷이라도―"
"입어."
기겁하는 치르메리아에게 옷을 내밀며 정색했다.
"이 오물이 네 위장막이다. 깨끗해 보이려는 순간, 우린 다 죽어."
한참의 실랑이 끝에, 치르메리아는 눈물을 머금고 옷을 받아들었다.
'저 결벽증, 현장에선 고쳐야 할 텐데.'
마지막으로 알메인은 거울 앞에 섰다.
준비해 둔 싸구려 갈색 가발을 뒤집어썼다. 머릿결이 개털 같다. 통기성은 최악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가렵군. 나중에 열 받으면 녹아내릴지도 모르겠어.'
눈에는 갈색 위장 렌즈를 꼈다. 서늘한 벽안이 평범한 밤색 눈동자로 가려졌다.
거울 속의 남자가 알메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더 이상 알메인이 아니었다.
지휘관의 날카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탐욕과 비굴함.
마치 다른 영혼이 그 육체에 깃든 것처럼, 거울 속 남자는 알메인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
탁하게 풀린 눈빛. 욕심에 찌든 입꼬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삼류 무역상.
완벽하다.
함선이 저고도로 내려앉은 건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오르비온은 페룸 감시망에 걸리지 않는 최대 근접 지점에서 세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페룸 외곽의 숲.
새벽 어스름이 깔려 있었지만, 공기는 축축하고 무거웠다.
주변의 나무들은 검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잎사귀 하나 없는 가지들이 흉물스럽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한 쇠 냄새가 폐부로 들어왔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장 굴뚝이군.'
미오멜은 배운 대로 구부정하게 걷고 있었고, 치르메리아는 더러워진 옷소매가 피부에 닿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걷고 있었다.
멀리 페룸의 드높은 성벽이 보였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성벽 위를 시커멓게 덮고 있었다.
알메인은 품속을 확인했다.
에나 무기는 깊숙이 숨겼다. 지금 손에 잡히는 건 유리병 하나.
찰랑거리는 소리.
투명하고 맑은 액체. 최상급 정제수다.
이 오염된 도시에서, 금화보다 더 가치 있는 뇌물.
"가자."
알메인은 어깨를 굽히고, 걸음걸이를 팔자걸음으로 바꿨다.
아첨꾼 같은 상인의 미소를 장착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걸 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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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스타일이라 나는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