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건 금방 쓰넹...
제3화: 황금의 통행증 (Golden Pass)
페룸의 남쪽 성문.
대기열에 합류한 지 한 시간이 넘었다.
"다음 놈! 뭘 숨기고 있어?"
검문소에서 고함이 터졌다.
알메인은 가려운 두피를 긁으며 앞줄을 살폈다. 싸구려 가발이 열을 가둬서 머리가 찜통이었다.
'저 상인, 운이 없군.'
와르르.
경비병이 상인의 짐을 발로 차버렸다. 사과 상자가 엎어지고, 멍 든 사과들이 진흙탕에 처박혔다.
상인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경비병은 창으로 그의 어깨를 밀쳤다.
"통행세가 올랐다고 몇 번을 말해! 이딴 푼돈으론 성문 냄새도 못 맡아!"
대기열 사방에서 기침 소리가 합창처럼 울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깊숙한 곳에 쇳가루가 쌓이는 기분이다.
알메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벽 아래의 공용 식수대를 곁눈질했다.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투명한 액체가 아니었다.
녹슨 갈색. 검은 찌꺼기가 섞인 오물.
사람들은 그걸 받으려고 서로 밀치고 있었다.
'정수 필터가 맛이 갔군. 아니, 파이프라인 자체가 썩었어. 에너지가 부족하니 유지보수를 포기했나.'
식수대 앞 인파 사이로, 뼈만 앙상한 아이 하나가 어른들에게 떠밀려 나뒹굴었다.
뒤쪽에서 미오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알메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뻗어 그녀의 팔을 가볍게 눌렀다.
'아직 아니야. 참아.'
미오멜의 커다란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힘이 빠졌다.
그때, 반대쪽에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감지됐다.
"힉."
치르메리아였다. 그녀는 바닥에 고인 오물 웅덩이를 피하려다 탭댄스를 추듯 발을 비틀었다.
용병으로 위장했으면서, 마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린 귀부인처럼 걷고 있다.
'저 바보가. '더러운 건 딱 질색이에요'라고 광고를 하고 있군.'
알메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치르메리아가 흠칫 몸을 사리며 시선을 피했다.
반면, 미오멜은 훌륭했다.
그녀는 2미터가 넘는 거구에 집채만한 짐을 지고, 땅에 코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헐떡이는 모습.
"허억, 허억... 허리가..."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아픈 거겠지. 저 짐 안에 예비 무기랑 식량을 다 때려 박았으니까.'
알메인은 상황을 정리했다.
경비병들의 눈빛은 탁했다. 치안 유지가 목적이 아니라, 약탈이 목적인 눈.
갑옷은 낡았고, 계급장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말단 중의 말단이다.
'저 위에 누가 있길래 이 정도 쥐꼬리들이 이렇게 설치는 거지? 다음은 우리 차례다.'
"다음! 거기 꼽추!"
경비병이 곤봉으로 미오멜을 가리켰다.
미오멜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컸다. 등을 잔뜩 구부렸는데도 경비병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경비병의 눈이 좁혀졌다.
"덩치가 뭐 이래? 야, 짐 내려봐."
위기다.
미오멜의 짐이 열리는 순간, 잠입 미션은 종료다. 바로 학살 미션으로 장르가 바뀐다.
미오멜이 당황해서 알메인을 쳐다봤다.
경비병이 짜증을 내며 손을 뻗어 짐꾸러미를 잡아당기려 했다.
"으윽?"
그의 팔이 휘청했다.
경비병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뭐야 이 무게. 안에 뭐가 들었어? 까봐!"
치르메리아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향했다.
살기(殺氣).
미세했지만, 전장을 겪어본 자라면 느낄 수 있는 서늘함.
경비병이 주춤하며 곤봉을 고쳐 쥐었다.
'이 멍청이들이. 여기서 칼을 뽑으면 날밤 새는 거 확정이라고.'
알메인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표정을 구겼다. 비굴하고, 탐욕스럽고, 겁 많은 3류 상인의 얼굴로.
"헤헤헤! 아이고, 나리! 고생이 많으십니다요!"
알메인은 경비병과 미오멜 사이를 파고들었다. 과장되게 몸을 낮추며 손을 비볐다.
경비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넌? 꺼져."
"아이고, 제 동생 놈이 좀 모자라서 말입니다. 짐은 그냥 돌멩이들이에요, 나리."
"시끄럽고, 비켜. 수상하니까 뒤져봐야겠어."
핑계를 대고 뜯어낼 구실을 찾는 눈이다.
알메인은 주위를 쓱 살폈다. 다른 경비병들은 딴청을 피우고 있다.
지금이다.
알메인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제발 먹혀라. 내 비상금.'
"그, 검문하시느라 목이 마르실 텐데... 이거라도 좀."
알메인은 소매 아래로 은밀하게 유리병을 건넸다.
찰랑.
투명한 병 안에 든 액체.
주변의 질퍽한 바닥, 녹물, 잿빛 하늘과는 이질적일 정도로 맑고 투명한 빛.
'최상급 정제수'.
경비병의 시선이 그것에 꽂혔다.
동공이 확장됐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먹혔군. 금화보다 물이 먼저라. 생각보다 심각한데.'
"이거..."
"아주 귀한 곳에서 떠온 '약수'입니다. 나리 피부가 푸석해 보이셔서 제가 특별히..."
알메인은 뱀처럼 속삭이며 경비병의 손에 병을 쥐어줬다.
경비병은 재빨리 병을 품속에 감췄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느꼈던 서늘함 따윈 이미 잊은 얼굴이었다.
'욕심이 무서움을 이기는군. 단순한 놈.'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크흠. 뭐, 딱히 위험한 물건은 없어 보이는군."
그는 미오멜의 짐을 툭 치며 손짓했다.
"지나가. 다음!"
'뻔하군. 욕망에 충실한 놈들은 다루기 쉬워.'
알메인은 굽신거리며 미오멜과 치르메리아를 이끌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의 짙은 그림자가 그들을 덮쳤다.
성벽 안쪽.
기대했던 도시의 풍경은 없었다.
매캐한 연기. 거리를 메운 썩은 냄새. 그리고 죽은 눈을 한 채 걸어 다니는 사람들.
화려한 방벽 도시의 내부는, 거대한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치르메리아가 소매로 코를 막았다.
알메인은 푹푹 찌는 가발 속에서 땀을 훔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 한 병에 영혼도 팔 기세였지. 안 봐도 뻔하군. 이 도시는 지금, 말라죽어가고 있어.'
잠입 성공.
하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고작 '도둑'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가자. 잘 곳부터 찾는다."
알메인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멀리서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광장 쪽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뭐야, 축제라도 해?"
치르메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메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건 축제의 북소리가 아니다.
'공개 처형. 볼거리가 없는 도시에선 사람 죽이는 게 오락이지.'
발밑의 쥐 시체를 밟지 않으려 한 발 비켜 섰다.
"가보자. 이 도시가 얼마나 썩었는지 직접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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