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봉 (未封)
우체국 자동문이 열리는 박자보다 민서의 진입이 반 박자 늦었다. 센서는 그를 늦게 인식했고, 문은 그가 몸을 절반쯤 밀어 넣었을 때야 완전히 열렸다.
민서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창구로 걸었다.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이 종이의 모서리를 습관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훅 끼쳐오는 젖은 우산 비닐 냄새, 그리고 마른 종이 먼지 냄새.
창구 앞에서 그는 봉투를 꺼냈다. 새 봉투였으나 헌것 같았다. 풀칠은 하지 않았지만 봉투의 배는 미세하게 울어 있었다. 어젯밤, 썼다가 지우는 대신 접었다가 펴기를 반복한 흔적이었다.
“받는 분 주소가 안 적혀 있네요.”
직원이 턱으로 옆을 가리켰다. 작성대 위에 끈으로 매달린 모나미 볼펜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서 주소 적어오세요. 문자 알림 원하시면 연락처도 같이요.”
민서는 펜을 쥐었다. 플라스틱 몸통이 미지근했다. 그는 봉투 위에 펜촉을 올렸다. 지현이 살던 곳. 이제는 그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비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곳.
주소를 적어 내려가는 동안 손아귀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갔다. 획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마지막 줄을 찍고도 펜 끝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연락처 란.
민서의 펜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열한 자리 숫자. 하지만 눌러서는 안 되는 숫자. 민서는 입술을 깨물며 숫자를 채워 넣었다. 펜 끝이 종이를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그가 봉투를 다시 내밀자, 직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받아 들고 자판을 두드렸다. 모니터 빛이 직원의 안경알 위에서 미끄러졌다. 민서는 화면 대신 저울을 내려다봤다.
12g.
겨우 12g이었다. 그 가벼움이 민서의 손을 무력하게 했다.
직원이 프린터 버튼을 눌렀다. 징, 하는 파열음과 함께 라벨이 토해져 나왔다. 직원의 손가락이 라벨 끝을 잡고 봉투의 한가운데를 향해 다가왔다. 민서는 그 손끝이 봉투에 닿는 순간을 상상했다. 우편함에 꽂히는 둔탁한 소리, 휴대폰으로 전송될 배송 알림, 그리고 지현의 눈.
라벨의 접착면이 봉투 한가운데에 잠깐 닿았다가, 다시 떼어졌다. 종이 표면이 미세하게 일어났다.
“접수합니다.”
“아뇨.”
대답이 선언을 잘랐다. 직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취소요. 안 보낼 겁니다.”
직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손끝에 붙어 있던 라벨을 반으로 접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접착면끼리 서로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질척하게 났다.
봉투 한가운데엔 사각형의 끈적한 자국만 남았다. 투명한 막이 얇게 남아 형광등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민서는 그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접착제는 지문 사이에 남아, 바지에 문질러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직원이 영수증을 내밀었다. 맨 윗줄에 [접수취소]가 박혀 있었다. 민서는 영수증을 봉투와 함께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봉투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늑골 사이를 찔렀다.
*
그날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지현은 서랍을 열 때마다 손잡이를 잡고 잠깐 멈추는 버릇이 있었다. 맨 아래칸. 낡은 다이어리 밑에 흰 봉투가 깔려 있었다. 입구가 벌어진 봉투. 풀칠하지 않은 뚜껑이 아가리처럼 반쯤 들려 있었다.
안에는 문장이 적히다 만 종이가 들어 있었다.
민서야. 사실은 무서워.
그다음 줄은 비어 있었다. 지현은 빈 줄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에 비친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과거의 병실이었다.
지현이 입원했을 때, 민서는 보호자 대기실이 아니라 늘 의사 옆에 서 있었다. 의사가 차트를 보며 지현에게 물었다.
“통증 수치는 어떠세요? 약을 조절해야 하는데요.”
지현은 입술을 적셨다. “그냥…” 하고 시작하려던 순간, 혀끝이 마른 입천장에 붙었다.
“올려주세요. 밤마다 힘들어합니다.”
민서였다. 지현이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서 쪽으로 몸을 틀었다. 민서는 지현의 침대를 등지고 의사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빠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적절한 타이밍에 질문했다. 지현은 베개에 머리가 파묻힌 채 입만 뻐끔거렸다.
의사는 지현을 보지 않은 채 차트에 적었다.
[보호자 대리 진술.]
민서의 말이 지현의 침묵 위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덮였다. 민서의 단호한 “네, 알겠습니다”가 병실의 공기를 점령했다.
간호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환자분 서명이 필요한데, 힘드시면 보호자분이…”
민서의 손이 펜을 낚아챘다. 지현은 손을 뻗으려 했다. 링거 바늘이 혈관을 당겼다. 그 통증에 멈칫하는 사이, 민서의 펜 끝은 이미 종이 위를 달리고 있었다. 사각, 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지현의 말보다 먼저 박혔다.
“걱정 마. 내가 다 처리했어.”
민서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그날 이후 지현은 말을 늦추는 법을 배웠다. 아니,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헤어지던 날, 민서는 “내가 더 노력해서 고칠게”라고 말했다. 지현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관계조차 ‘처리’하려 한다는 것을.
지현은 현재로 돌아와 휴대폰을 켰다. 대화 목록 맨 아래, 오래된 날짜 밑에 민서의 이름이 묻혀 있었다.
*
일 년 만에 온 연락은 짧았다. ‘줄 게 있어. 이것만 주고 갈게.’
카페 창가 자리는 볕이 들었지만 테이블 위는 빙판처럼 서늘했다. 컵 바닥에 녹은 물이 흥건했다. 민서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흰 봉투였다.
일 년 전의 것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고 종이는 습기를 먹어 눅눅했다. 한가운데, 네모난 빛의 흔적. 접착제가 붙었다가 떨어져 나간 자리가 흉터처럼 번들거렸다. 봉투 옆으로 구겨진 영수증 한 장이 같이 굴러 나왔다. 열전사지의 글씨는 반쯤 날아가 ‘…소’라는 글자만 희미했다.
“버리지 못했어.”
민서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끝에는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결론을 내리고 싶어 했다.
“그때 내가 너한테 하려던 말은—”
지현은 봉투 입구에 검지를 넣어, 안의 종이를 아주 조금 끌어올렸다. 글씨가 보이기도 전에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는 종이를 읽는 대신, 다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지 마.”
민서의 입술이 굳었다. 지현은 컵을 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설명하지 마. 납득시키지도 마.”
민서가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아래로 숨긴 그의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쥐었다. 처음으로, 그의 ‘처리’가 막혔다.
민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의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양손이 봉투의 양 끝을 잡았다. 종이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손목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 그는 이 지지부진한 종이를 찢어서라도 끝을 맺으려는 듯했다.
탁.
지현의 손이 민서의 손목을 눌렀다. 찢어지는 소리 대신, 둔탁한 마찰음이 났다.
“아니.”
지현은 민서의 눈을 보지 않고, 팽팽하게 당겨진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찢지도 마.”
민서의 손이 멈췄다.
“그냥 둬.”
지현의 손이 민서의 손에서 봉투를 빼냈다. 그녀는 봉투를 닫지도, 찢지도 않은 채 테이블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입구가 벌어진 봉투는 힘없이 축 늘어졌다. 끈적한 자국이 빛을 한 번 튕겼다가 사라졌다.
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서는 봉투를 다시 집어 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지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카페 문은 손으로 미는 문이었다. 뒤따라오던 민서가 습관처럼 문을 잡아주려 일어섰다. 하지만 지현이 빨랐다. 그녀의 손바닥이 무거운 유리문을 밀어냈다. 종소리가 났다. 문은 지현이 나간 뒤에야 천천히 닫혔다.
민서는 홀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구석에 밀려난 봉투만이 입을 벌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민서는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렸다.
방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봉투 가운데의 사각 자국이 번들거렸다. 입구는 여전히 풀칠되지 않은 채 벌어져 있었다. 안에 든 것은 편지 한 장뿐인데, 그 무게가 방 전체를 짓눌렀다. 닫지 않았기에 쏟아질 것 같았고, 쏟아지지 않았기에 닫을 수 없었다.
민서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잡동사니들 아래로 봉투를 밀어 넣으려다 멈췄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결국 서랍을 닫지 못하고, 봉투를 다시 책상 한구석으로 꺼냈다.
방이 더웠다. 민서는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들이닥쳤다. 책상 위의 종이들이 흔들렸다. 묵직한 책 사이에 끼워두지 않은 흰 봉투 하나가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풀칠하지 않은 뚜껑이 바람을 맞아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툭, 투둑. 종이가 책상 바닥을 치는 소리가 났다. 봉투는 날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계속 입을 벌렸다.
민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지만, 어둠 속에서도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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