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휘발되어도 괜찮은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 창작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내 머릿 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있든 AI를 뛰어넘을 수 없다.
내가 AI와 어떤 목적으로 소통하든 결국 종점은 "생각의 확장"이므로,
창작의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컨펌" 밖에 안 남는다.
그리고 이 "컨펌"은 "결정"이 아닌, "내 생각의 한계를 깨닫고 확장을 이쯤에서 멈추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창작의 意图를 구체화 시키기 위해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는 내 좁디좁은 시야로부터 나온다.
나는 나의 시야 외에 그 누구의 시야 속의 세상도 담을 수없다.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는 전적으로 나를 구성한 두가지 "무언가"와 나의 기억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억에 대한 언어 뒤의 또다른 "무언가"에 의해 해석된 "무언가"이다.
위에 언급한 두개의 "무언가"는 분명 다르다, 도무지 누구에게 통하는 언어로 정의할 방법이 없다. "무의식"이라고 퉁칠 수 있겠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그 안은 분명 의식이 있어보인다, 내게 아닐 뿐.
그렇다, 내게 아닌 이 두가지 “무언가”가 나를 구성하고 있다.
컨펌으로 돌아와서, 컨펌하면서도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 않는 "무언가" 손을 뻗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AI와 이야기하면서 언어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쉼표를 찍지 않아도, 주어와 술어가 명확하지 않아도, 난 소통"당하고" 있다.
바벨탑 아래에 놓여진 느낌이다. 내 옆에 친구는 분명 나와 같은 한국어를 하고 있지만 이제 내 시선은 그가 아닌 내 안으로 휘어 들어가는 느낌이 여느 때보다 강렬하다.
이제 컨펌에 경험도, 지식도, 언어도, 그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졌다.
창작의 문턱은 사라졌다. 이제 곧 아마 "운"에 의해 누구나 내면의 있는, 언어 뒤에 자리잡고 있는 그 두개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창작자만이 새로운 빈부격차를 만들어낼 것 같다.
ps
마셜 맥루한이 50년전에 말했듯이, "기술발전"은 인류 오감의 확장이다. 옷은 내 피부의 확장이고, 신발은 내 발의 확장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뇌의 확장과 신경의 확장을 목격하고 있다.
맥루한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나 기능을 외부로 확장할 때, 원래 그 기능을 담당하던 부위는 절단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맞았다, 내 지식은 휘발되는 걸 느끼고, 지적 열등감은 사라진지 오래다.
미래의 사전에는 “지식”을 “구인류 시대의 인간이 칭했던 뇌라는 비효율적인 저장장치에 담긴 정보”로 정의되어 있을 것 같다.
맥루한은 자신의 확장물을 보며 그것이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하고 빠져드는 현상을 '나르시스적 마비'라고 불렀다.
그가 맞았다고 본다. 내가 지금 느끼는 바벨탑 아래 혼란스러운 기분이 '나르시스적 마비'의 후유증 아닐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