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유주의자긴 하지만 낙태는 아무래도 생명과 직결된 문제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걸 망설였던 적이 있는데


더 자세히 공부해 보니

생명중시와 모성을 이유로 낙태에 반대하는 게

어쩌면 가부장적, 정확히는 수컷중심적인 사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으로서의 모성’이 우리 사회에서

마치 여성의 생물학적 자질인 것처럼 당연하게 간주되고, 때로는 은밀하게 강요되고 있기도 하지만,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암컷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조건적 헌신이라기보다 조건부적 헌신에 가까움


실제로 자연에서는 반모성적으로 여겨지는 어미의 행동들이 심심찮게 관찰되는데

거기에는 마냥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음


암컷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번식상의 판단'에 따라 굉장히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동물임

암컷의 번식 성공을 좌우하는 요인은 수컷의 경우처럼 단순히 수정의 횟수가 아님

암컷으로서는 선택한 정자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낳은 자식의 생존률 또한 중요함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암컷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함

번식이 불리한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자가 낙태를 하거나, 태어난 새끼를 섭취해버림으로써 번식을 회수하기도 하고,

주변의 수컷들에 의해 새끼가 살해당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게끔 난교 전략을 펼치기도 하며,

생존 능력이 뛰어난 새끼만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도 함

기운이 넘치면 다른 암컷이 낳은 새끼들을 죽여버림으로써 자식의 잠재적 방해물을 제거하고 암컷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함


어머니는 자애로울까?

아님, 어머니는 차라리 무시무시함


어떻게 보면 현대 사회의 워킹맘들도 그렇지

생에 대한 악랄하고도 숭고한 집착, 악마 같은 수완과 천사 같은 넉살, 근성, 인내력, 초인적인 태도, 일에 임하는 절박성, 그악스러움, 유능함, 대인배 마인드 등

숱한 위기를 뚫고 어머니의 역할과 일의 균형을 유지해나가는 과정에서 세상 모든 어머니는 점차 정신의 스케일이 커지고 무시무시해지는 걸까 싶기도 함


백만 년 동안 영장류 어미들은 생산 활동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거나 대행 부모의 도움을 받는 등의 ‘타협’을 통해 생산과 재생산의 삶을 결합해 왔음

오히려 생산과 재생산을 임의적으로 구획하고 사회적 노동을 접은 채 오로지 양육에만 매진하는 현대 사회 어머니야말로 새로운 유형임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모성', '헌신적인 모성'이라는 건 결국 수컷 중심 문명의 신화가 아닐까? 싶기도 함


그래서 낙태를 태아 생명 존중을 이유로 반대하는 것도

'수컷의 번식상 이점'을 추구하는 마인드가 은연중에 깔려있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해

수컷 입장에서는 어차피 자기가 기를 것도 아니고 책임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싸지르고 보게 하는 게 번식상 더 유리하지

하지만 암컷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