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심문한 곳은 죽은 헤로데의 왕궁이었을 것이다. 로마총독들은 예루살렘 머물 때 그곳에 머무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코복음에서는 그곳이 ‘총독공관’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총독이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문 당시, 빌라도가 예수에게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빌라도의 질문은 남루한 예수의 행색에 비추어 ‘너 같은 게 왕이라고?’ 하는 ‘조롱조’였을 테고, 응수하는 예수의 답변 역시 ‘조롱조’였으며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며 사실상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발음할 때까지 한 마디도 입에서 떼지 않았다.
빌라도가 바라빠와 예수 가운데 한 사람을 놓아주려고 했다는 것은 관행상 납득하기 어렵지만, 사실이라 해도 예수 대신 바라빠를 놓아주었다면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보통 ‘강도’를 기록되어 있는 무리들은 로마제국에 도전한 혁명가들이었으며, 이들은 폭력에 호소했지만, 예수는 비폭력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빌라도의 사형선고는 예수의 행위 역시 제국의 안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사실상 성전세력은 로마의 현지협력자였고, 이들의 안위를 흔드는 것은 곧 로마의 안위를 흔드는 것과 같다. 좀더 실질적인 이유는 당시 로마의 정황 때문에 지위가 불안했던 빌라도는 유대 성전세력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어떠한 소요도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이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쳤던 군중들은 ‘제한된 소수의 무리’였을 것이다. 이날은 유월절 전날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중들은 경황이 없이 바쁜 날이다. 또한 헤로데의 왕궁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성전세력에 의해 포섭된 사람들로 추정되는 군중들은 ‘초대받은 시위대’였다. 성전세력은 한 주일 내내 기다렸다 예수를 잡아넣었는데 엉뚱한 군중들 때문에 일을 그르칠 이유가 없었다. 빌라도의 재판에 앞서 여론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요한복음은 빌라도가 예수의 사형선고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결국 예수의 고발자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 19,12)라고 협박해 빌라도의 결심을 굳혔다고 전한다. 빌라도 총독은 막판에 예수를 가리키며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었고, 수석 사제들에게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라는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빌라도는 밑질 게 없었다. 이제 유대인 촌뜨기 한 명만 처형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사마리아 출신이었을 로마군인(외인 보병대)들에게 인계된 예수는 관례에 따라서 다른 정치범들처럼 고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군인들은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가짜 대관식을 벌이곤 다시 예수의 본래 옷을 입혀서 형장을 끌고 갔다. 매질하고 옷을 벗기는 행위는 죄수에게 무력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줘서 처형에 순응하게 만든다.
처형장은 ‘해골 터’라는 뜻의 골고타였다. 전에 채석장이었던 묘지였다. 성벽 바깥에 있는 골고타는 헤로데 궁전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이것에 지금은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아나스타시스(Anastasis), 즉 부활교회라 부른다. 예수가 지고 갔던 가로목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나자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반대했지만 빌라도가 굳이 이 명패를 달아놓은 이유는 명백하다. 로마제국이 유대인의 왕을 능가한다는 조롱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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