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라는 성별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진보적인 자세가 아니나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는 진보와 대립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남성이 남성성이라는 것을 획득하지 않으며 반대로 여성이 여성성에 순종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성성이란 가부장제 하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지배적(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의미합니다. 저메인 그리어는 자신의 저서 <여성, 거세당하다>에서 서구 문화가 문화의 형식을 통해 남성을 끊임 없이 지배적이고, 능동적인 정복가로, 반대로 여성을 순종적이고 온순한 객체로 전락시키면서 여성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억지로 "지배적 남성성"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데, 이른바 오늘날에 표상되는 남성성이라는 것은 윤석열이나 배인규의 그것과 다른 것이 아닐겁니다.

진보 한남충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은 이 남성성을 극복하지 않은채 외피적으로 진보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보 한남충의 세계관 속에서 남성은 여전히 지배적인 "노동자"로, 여성은 여전히 가정 내에서 남아있어야할 "객체"로 전락합니다. 물론 이들은 남성우월주의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며, 자신을 남성우월주의와 같은 사상에서 거리가 멀다고 주장하고 또 스스로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어느정도는 "진보적"이긴 합니다. 최소한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심지어 "페미니즘"을 지지하기도 하며, 이들은 실제 운동에 있어 어느정도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여성을 지배하고 객체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남성성의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정한 수준에서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 (1970)>에서 진보 남충의 성격을 어느정도 분석했습니다. 파이어스톤에 의하면, 이른바 페미니즘에 긍정적인 남성들조차 상당수가 여성을 "좌파 혁명의 여성 지원군" 등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몇가지로 정리됩니다: 우선 그들은 여성이 충분히 "진보적일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가르치려 들고, 페미니즘이 개인의 감정에 불과할 뿐 더 높은 수준의 혁명적 사상(예를 들어 노급 혁명 사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들은 물론 여성해방의 필요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해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들은 여러가지의 이유를 들며 "여성해방은 당장 이루어야할 것이 아니다" "일단 노급혁명이나 민주주의 등 더 중요한 이슈를 달성한 이후에 여성해방을 이야기하자"라는 주장을 펼치곤 합니다. 또한, 언제나 여성을 자신들의 "지원부대"로 여기고자 하며, 깨어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 형식적 자리만을 여성에게 양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어스톤은 이런 "좌파 남성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좌파는 언제나 페미니즘에 비해 여성해방에 있어 열등할 수 밖에 없다고 분석합니다.

파이어스톤은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겨냥하며 이런 내용을 썼는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부 민주당 지지 20대 남성이나 혹은 진보진영을 지지하는 20대 남성에게서 이런 특징들이 자주 관찰됩니다. 이들의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공통되고도 심각한 문제는 페미니즘을 진지한 정치 세력으로 보지 않으려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안티페미니즘도, 페미니즘도 지지하지 않는다"라거나, 혹은 "페미니즘은 성별 적대에 기초하여있으므로 노동자나 민주 시민들의 단결을 저해한다"라고 주장한다. 현재 안티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의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중립>을 자처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 비-페미니즘 - 즉 안티페미니즘을 응원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을겁니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을 성별적대로만 바라보고 그것을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는 것도 안티페미니즘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시로는 "리버럴 페미니즘은 지지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은 극복해야한다"라고 주장하는 한남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유리천장 이론이나 적극적 우대정책 등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전개되었던 논의들을 "래디컬"한 것으로 오해하고, 배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즉 리버럴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래디컬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며,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요 사상가와 책을 대보라고 하면 하나도 대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진보 한남충들이 보기에 고분고분해보이는 페미니즘"이 리버럴 페미니즘이고, 진보 한남충의 "한남적 성격"을 거스르는 사상은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한남충들이 허락한 페미니즘"이지 다른게 아닙니다. 나아가 이들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가르치겠다"면서 래디컬 페미니즘과 리버럴 페미니즘을 구분지어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런 맨스플레이닝이야말로 남성우월주의의 발현입니다.

다시 말해, 진보 한남충이라는 것은 막연하게 박원순 옹호자 같은 성격을 지닐 뿐 아니라 끊임 없이 페미니즘의 저항적 성격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그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상당히 보편적인 형태의 남성 좌파의 양태인 것입니다. <성별이 문제가 아니라 계급이 문제다> 같은 말들이야말로 진보 한남충스러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급 투쟁을 중요한 것으로 놓고, 성별 투쟁을 부차적인 것으로 놓는 것인데, 사실 한국 여성들이 겪는 실질적인 문제를 보면 무엇이 우선인지는 명확합니다. 보다 높은 수준에서 논의하자면 현 단계에서 성별 투쟁과 계급 투쟁은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문제이고 이를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극우의 맥락에서 놀아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BSW당의 실패는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 주요 대학 운동은 90%가 여성의 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10% 남성들이 이상하게 객기부리다가 쳐맞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래서 한남충들은 진보를 할거면 좀 조신해야할겁니다. 스스로의 남성성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에 진정한 진보 운동을 하는건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남성들은 끊임 없이 여성을 짓밟고 주도적, 주체적이 되려는 스스로의 경향을 극복해야하고 자신의 행동거지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결국 진보를 한다는 것은 타자를 존중함을 의미합니다. 끊임 없이 상대를 객체화하려 드는 남성성에 대항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보한남충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없애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