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창조적 의지가 지닌 자기원인적 성격과 존재의 자기현현이라는 형이상학적 지위를 고찰하며, 그것이 자본주의 기호체계와 집단적 동일성의 강제 구조 속에서 어떻게 타자화되고 수단화되는지를 비판한다. 창조성은 본래 목적 없는 목적성의 구조를 띠며,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삼는 순환적 개방의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를 외적 목적에 예속시키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 구조 속에 편입시킨다. 더욱이, 창조적 주체가 타자의 질투를 유발하고 차이를 생산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공산주의 체제의 태생적 모순과 폭력성으로 이어졌다. 이 글은 창조의 존재론이 어떻게 질투와 동일성의 명령 속에서 전도되는지를 분석하며, 욕망의 구조, 타자성의 위상, 그리고 차연적 운동을 통해 정신의 자율성을 재사유한다.
1. 창조성의 자기원인성과 존재의 생성 구조
창조란 외부 원인에 의존하지 않는 자발적 생성이며, 자기원인(causa sui)으로서의 자기형상의 운동이다. 이는 정태적 실체가 아닌, 가능성의 운동으로서 존재를 드러낸다. 창조적 의지는 목적에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내적 필연성에 따라 자신의 형식을 도출해낸다. 이 형이상학적 창조는 타자의 인정이나 동일화의 질서에서 벗어난 고유한 자기현현이다. 그러나 체제는 이를 견디지 못한다. 차이는 항상 동일성의 체계에 의해 억압되고, 자기원인은 외부 명령의 질서에 포섭된다.
2. 질투의 형이상학: 창조의 대상화와 집단적 폭력
창조성은 본질적으로 타자적이다. 그것은 체계가 아직 포섭하지 못한 것, 동일성의 논리에서 벗어난 무엇이다. 이 타자성은 다수에게 불안을 유발한다. 동일한 것을 강요하는 체제는 창조적 주체가 발산하는 차이를 제거하려 하며, 그 제거는 흔히 질투라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창조는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균열에서 발생하지만, 체제는 그것을 자산으로 대상화하거나,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 질투는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극단화되며, 창조적 개체의 존재 자체를 불온한 특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창조성이 공동의 빈곤을 부끄럽게 한다는 이유로 억압되고 말살된 비극은, 결국 창조가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체제가 어떻게 파괴적인 방향으로 치닫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3. 기호경제와 창조성의 상품화
자본주의는 창조적 의지를 기호체계 속에서 반복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단위로 환원시킨다. 창조성은 자기원인을 상실하고, 타자적 수요에 맞춰 재구성되며, 반복적 기호의 위치로 포섭된다. 이는 욕망이 자율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결핍의 이식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창조물은 자기 존재의 현현이 아닌, 시장의 욕망 구조에 맞춘 시뮬라크르가 된다. 창조의 가능성은 여기서 차연되고, 모든 차이는 지연되고, 모든 지연은 잉여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4. 목적 없는 목적성과 수단의 반란
창조는 수단과 목적의 이분법을 붕괴시키며, 오직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자기목적적 운동은 모든 외적 가치의 명령으로부터 벗어난 실존의 방식이다. 하지만 체제는 이 운동을 수단화하려 한다. 창조는 팔려야 하며, 교환되어야 하며, 경쟁되어야 한다. 체계는 이 자율적 운동을 가공하여 효율성과 성과의 논리로 가두고, 목적 없는 목적성은 기능 없는 낭비로 재정의된다. 창조적 존재는 체제 속에서 예외가 아닌 오류가 되고, 축복이 아닌 결함이 된다.
5. 차연과 파열로서의 회복 가능성
창조성은 결코 고정된 질서 안에 정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체계의 틈새, 의미의 지연, 동일성의 이음새에서 발생한다. 차연은 동일성의 붕괴를 요청하며, 창조란 이 차연을 실천하는 사건이다. 존재의 틈에서 도래하는 창조는 자기의 원인을 바깥에 두지 않으며, 스스로를 분열시키며 형성된다. 회복은 회귀가 아니라, 반복 불가능한 탈기호적 생성이다. 창조는 다시금 명령이나 질투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며, 자기-기원의 자리에 서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질투와 동일성의 폐허
창조성은 언제나 다수의 질서를 위협한다. 그것은 평등을 가장한 획일성의 체계 안에서 이질적이며, 질투와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는 창조를 상품으로 만들고, 공산주의는 그것을 제거할 위협으로 인식했다. 질투는 창조의 타자성을 파괴하려 하고, 동일성은 그 유일함을 말살하려 한다. 그러나 창조적 의지는 자기원인의 구조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계의 폐허 속에서도 파열로서 나타나고, 언제나 새로운 생성의 서막으로서 존재한다.
불란서철학인데 리버럴의 도구화된지 오래죠 처음부터 그랬고요
데리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