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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나 행사들을 보면, 이한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를 마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의로운 청년들처럼 소개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자유를 위해 싸운 순수한 젊음”... 듣기에는 아름답다. 그런데 과연 이 묘사가 진실에 가까운걸까?

사실 이한열, 박종철 두 사람 모두 1980년대 당시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급진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로의 변혁에 가까운 급진적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단순히 “투표권” 같은 문제만을 위해 싸운 게 아니다.

물론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투표권을 쟁취하는 것은 중요했지만, 그들은 더 큰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상적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을 일독하기도 했다. 이건 그들이 남긴 독서 노트나 주변인들의 증언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한열, 박종철 열사를 “자유주의적 민주화 투사”로만 기억하게 되었을까? 바로 자유주의 미디어의 기억 소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1987년 이후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부분적 체제 개편을 했지만, 근본적인 사회구조 — 즉 자본주의 체제, 미국 종속 구조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한열, 박종철의 급진성을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일이다. 주류 미디어는 이들의 “급진성”을 지우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편입될 수 있는 형태로만 기억을 재구성한다. “민주화운동가” 이한열과 박종철은 허용할 수 있어도, “마르크스주의자” 이한열과 박종철은 허용할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의 태도이다.

필자는 그동안 조지 오웰의 <1984>가 “전체주의 진영”의 나라들이 아니라 영미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분석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자유주의 미디어의 행동은 <1984>에 나오는 “과거 수정”과 너무 닮았다. <1984> 속 권력은 언제나 과거를 다시 쓰고, 현실에 맞게 조정한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허락된 기억만을 소비하고 있다.

비슷한 일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독일에서도 벌어진다. 지난 2023년 하마스가 주도한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터진 이후 통일 독일의 주류 매체에서는 “독일인은 항상 이스라엘을 인정해 왔으며,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세력과 싸워 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우선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은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동독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지했고,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동독 사람들은 명백히 이스라엘을 “서방 제국주의의 대리국가”로 보고, 아랍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1960년대 서독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지 않았다. 당시 좌익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활발했던 서독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이스라엘 정착식민주의를 규탄하고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 독일 적군파(바더 마인호프)가 PFLP(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와 함께 조직한 반이스라엘 테러작전들이다.

하지만 독일이 통일되고, 좌익 테러단체들의 활동이 “탈이데올로기화” 기조에 따라 망각의 강을 건넌 이후, 이 “불편한” 진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독일과 독일인이 마치 “전체로서” 항상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원해왔던 것처럼 포장된다. 과거는 지워지고, 현재에 맞춰 재구성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984>에 나오는 이 구절을 두고 공산전체주의의 무서움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공산전체주의 이전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민주화 서사”나 “국가적 기억”이 얼마나 많은 삭제와 덧칠 위에 세워진 것인지 한번쯤은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