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보나 마나


국힘이 자폭하고 있고

쌍권이 이씨 되기를 바라고

깽판 놓고 있는 것을

보더 라도


이미 이 나라는 95%적화되었고


중국 자본에  정치권들이

거의다 넘어 갔음



월남처럼 남한도 패망할것이

너무나 확실한 상황.



월남이 1973년에 평화 협정에 속아서

미군 철수 하자

불과 2년만에 1975년에

전쟁에서 패배하여


공산화 되었다.

이때에 갑작스럽게

월남을 탈출한

인원이 비공식으로

500만명이고


공식적으로 떠난

인원이 102만명

이들을 보트 피플이라고

부름.



이들은 월남이 갑작스럽게

공산화되자


몸만 간신히 챙겨서

배를 타서 탈출 했음



공산화되어

탈출 하지 못했던

월남 국민들 중

무려 900만명이 대량 학살 당함





이렇듯  남한도 비슷한 상황


그러 므로

정권 바뀌면

시간 있을때


준비 하여

챙길거 전부 챙기고

한국 탈출 하기 바람

아프가니스탄도

미군이 갑작스럽게 철수 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왔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중이고


탈레반이 다시 장악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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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 후 900만 명 살해 당해
  
1973년 1월 월맹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위장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 십 개의 언론사를 설립하고 월남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가 등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좌익 단체들은 틈만 나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75년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공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개 좌익 단체의 선전전(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더 심각했던 것은 군(軍) 지도부가 걷잡을 수 없이 부패했다는 점이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장교나 병사로 입대한 후 뇌물을 주고 장기 휴가를 받아 해외 유학을 떠나거나 대학 입학, 취업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장군들이 운영하는 개인기업체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도 입대하자마자 장기 휴가를 받아 외국 유학을 떠났다.

이대용 공사는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고 불렀는데,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유령 군인, 꽃 군인이었다고 한다.



군과 국가 지도층의 파렴치한 부패와 부정축재, 천민(賤民)자본주의 행태는 공산 세력들의 훌륭한 공격 목표가 되었다.

지도층의 적나라한 부패에 분노하던 일선 장병들은 공산군이 쳐내려오자 장비고 뭐고 다 버리고 도주하기에 바쁜 장군들과 장교들을 보면서 썩어빠진 체제에 절망하여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과 사명감을 상실했다.

이것이 강력한 무장을 보유한 월남군이 눈사태처럼 붕괴한 진짜 이유다. 이대용 공사는 “정신무장이 해제된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고 질타했다.




월남 패망 후 수도 사이공은 호치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산군이 사이공에 입성하자 친북 좌파 시민들이 월맹기를 들고 나와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공산 통일이 이뤄지자마자 반체제 운동을 벌였던 종교인, 학생 등 속칭 민주 인사들 거의 대부분이 월맹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反)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즉결 처형되거나 참혹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적화통일 된 후 거의 9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 당했다.

공산체제에서 써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장교나 엔지니어, 의사, 교사 등 100만 명은 인간 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어 사상 개조 학습을 받았다.



이들을 수용할 형무소가 모자라자 공산정권은 과거 월남군 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죄수들을 수감했다.

학정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뗏목이나 소형 어선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을 감행했는데,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 당하거나 망망대해의 뙤약볕 아래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