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쿠데타 시도에 익숙한 나라다. 이승만 정권은 친위쿠데타나 다름없는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박정희 정부는 5.16 정변으로 시작해서 10월 유신을 거치며 김재규의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12.12 정변으로 탄생했으며, 민주화 이후 통합진보당 소속 종북주의자들이 내란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이토록 쿠데타는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존재하는 튀르키예 역시 현대사를 논할 때 쿠데타를 빼놓을 수 없다. 튀르키예 군부는 오랫동안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치판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수차례의 쿠데타는 튀르키예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오늘날 튀르키예군은 더이상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수차례의 개혁과 쿠데타 협박, 대규모 숙청과 쿠데타 시도, 그리고 또다른 개혁과 숙청, 회유의 바람 끝에 튀르키예군은 마침내 정치적으로 확연히 중립적인 기관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19세기 말 풍전등화의 오스만 제국에서 시작된다. 당시 열강의 침탈로 고생하던 오스만 제국에서는 압뒬하미트 2세가 집권했다. 집권 초부터 러시아의 침공으로 상당한 영토를 잃고 굴욕 당한 그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펼치면서 서구 자본의 힘을 빌려 산업화를 진행시켰다. 또한 제국 내부의 독립운동을 억제하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제국의 이슬람 정체성을 강조했고 범이슬람주의적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압뒬하미트 2세의 개혁들은 분명 성과는 있었지만 제국을 지키기에는 부족했다. 오스만 제국의 국경은 내부 소수민족들과 열강들에게 영토를 빼앗기면서 거듭 후퇴했다. 황제는 갈수록 커져가는 불만의 목소리를 탄압했고, 작은 궁전에 은둔하면서 제국 전역에 비밀 사진사들을 파견해 이들이 찍어온 사진을 기반으로 통치했다.
결국 1908년 압뒬하미트는 급진파 결사단체 청년튀르크당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강제로 양위했다. 그러나 청년튀르크당은 오히려 더욱 무능했는데, 오스만 제국 내부 소수민족들을 박해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결국 패전하면서 제국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압뒬하미트는 적잖은 튀르키예인들에게 군사 쿠데타로 억울하게 폐위당한 비운의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1923년, 청년튀르크당 소속이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은 뛰어난 군재로 오스만 제국의 폐허에서 사투를 벌여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져냈다. 아타튀르크는 새로운 공화국이 오스만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탈아입구 사상에 기반한 여러가지 개혁 조치를 취하며 자신의 이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아타튀르크는 서구식 법률 체계를 도입했고 문자도 서구 알파벳으로 교체했으며 서구식 성평등을 추진했고 서방의 성씨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한편으로 사유재산은 허용하되 경제 전반을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하는 국가주의 정책을 펼쳤다.
아타튀르크의 사상 케말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두가지 개념은 바로 세속주의와 민족주의였다. 이슬람이 오스만 제국 쇠락의 원인이라고 믿은 아타튀르크는 반종교에 가까운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종교를 국가차원에서 관리하도록 했으며 자신이 보기에 해로운 교단들은 강제로 금지했다. 또한 히잡 같은 종교적 의상을 착의하는 것 자체를 틀어막고 종교 활동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는 반대로 열렬한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해 튀르키예어를 ‘정화’하는 작업을 시행했고, 소수민족의 존재를 부정하며 튀르키예 안의 모든 사람들은 튀르키예인이라고 주장했다. 튀르키예 정체성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족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아타튀르크의 조치들은 튀르키예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개혁 정책은 튀르키예인들의 인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고 뒤떨어진 제도를 현대화 했으며 정교분리 원칙을 확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종교를 억눌렀기에 큰 반발을 샀고, 인구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심각하게 차별했으며, 경제가 경직되게 만들어 경제개발에 해를 끼쳤고, 위에서부터 강압적인 개혁이었기에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문화를 형성했다.
어찌하였든 이런 아타튀르크의 케말주의 사상은 튀르키예 군부에게 거의 새로운 종교처럼 받들여졌다. 아타튀르크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경계하며 반대했지만, 그의 사후 튀르키예군은 아타튀르크의 의지를 이어가겠다며 오히려 아타튀르크의 소원과 다르게 매우 정치적으로 행동했다.
이들은 초강경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서구화와 통제경제로 대변되는 ‘케말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게 되었고, 그 가치관이 흔들린다고 판단할 때(혹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군부가 자신들의 쿠데타와 정치 개입을 당연한 의무로 여긴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국면이 시작되자, 군부와 관료집단 그리고 공화인민당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1946년에 치러진 최초의 정상적인 총선은 누가 봐도 명백한 더러운 부정선거였다. 오랜 일당 독재에 싫증나고 부정선거에 분노한 튀르키예 국민들은 1950년 공정하게 치러진 총선에서 전체 487개 의석 중 416석을 야당 민주당에게 안겨줬다. 최초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였다.
아드난 멘데레스가 이끌던 중도우파 성향 민주당은 공화인민당 내부 인사들이 갈라져 나와 만든 정당으로, 비교적 종교에 유화적이고 시장주의를 지향하며 기존 관료층을 불신하는 동시에 농촌을 대변했다. 민주당 정권은 초창기 한국 전쟁에 참전해 튀르키예의 NATO 가입을 성사시켰고, 시장 자유화 조치와 대대적인 농촌 개발, 농산물 수출을 통해서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민주당은 1954년과 1957년 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더 파격적인 조치는 종교 정책이었다. 민주당은 아타튀르크의 종교 정책이 지나치게 억압적이라고 판단하여 종교의 자유를 확대시켰다. 이는 그동안 공화국이 배격해오던 종교적 가치에 정당성을 재부여한 것이다. 수많은 튀르크인들은 종교의 자유 보장 조치에 환호했으나, 군부와 케말주의자들은 아타튀르크의 핵심적 사상에 역행한다고 분노했다. 멘데레스가 쿠르드족의 인권을 향상시키겠다고 약속한 것도 민족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때문에 멘데레스 정권은 계속해서 소규모 쿠데타 음모에 시달렸다. 위기감을 느낀 멘데레스는 이런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 군 장성들을 대거 숙청하고 문민 통제를 확보하는 군부 개편을 원했다. 그러나 군의 고위 장성들은 당연히 그런 조치들을 지지하지 않았고, 멘데레스는 어쩔 수 없이 문민통제 확보 계획을 물려야 했다.
민주화 덕분에 당선되고 자유를 확대하던 멘데레스 정권은 결국 그에 반대되는 조치를 감행하면서 몰락했다. 경기가 악화되고 종교 자유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정권에 균열이 생기자, 말년의 멘데레스는 점점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갔다. 언론과 지식인은 갈수록 탄압받았고 정부의 독단성은 강화되었다. 그럴수록 군부를 비롯한 케말주의자들의 반작용도 강해졌다. 군부의 장교들은 점차 멘데레스의 통제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멘데레스는 이런 군인들의 움직임에 점점 불안해했다.
1960년 4월 18일, 정권을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을 수사하려는 위원회가 설치되자, 대도시의 튀르키예 대학생들과 야권 지지자들은 거리로 나와 반정부 시위를 펼쳤다. 불만이 쌓여가던 군부는 마침내 멘데레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고, 5월 27일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일으켜 멘데레스를 끌어내렸다.
멘데레스와 다른 당 지도자들은 반국가세력으로 지목되었고, 국제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처형당했으며, 민주당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분노한 멘데레스의 지지자들은 멘데레스를 군부에 저항하다 사망한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인식했고, 압뒬하미트가 폐위된 사건처럼 이를 잊지 않았다.
쿠데타 이후 군부는 공화인민당과 힘을 합쳐 튀르키예의 미래를 설계했다. 민주당이 3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한 것을 본 이들은 앞으로 생겨날 민주당의 후신 정당들이 폭주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조치를 고안했다. 1961년 새롭게 제정된 헌법에선 시민과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고 시민 사회의 역할을 대폭 향상시키는 조항들이 들어갔다.
그러나 동시에 케말주의자들로 채워진 헌법재판소가 신설되었고, 관료층의 경제 통제를 강화하는 국가계획국이 설립되었으며, 실질적으로 군이 정부를 감시하고 막후 실세로 군림하게 해주는 도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도 만들어졌다. 끝으로 군대의 쿠데타를 사실상 합법화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군부와 공화인민당의 우려는 선견지명으로 드러났다. 1965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성향을 그대로 계승한, 쉴레이만 데미렐이 이끄는 중도우파 정의당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챙기며 승리한 것이다. 데미렐은 군부에 유화적으로 나오고 종교자유주의적 색채를 완화했으나, 전반적으로 기존 민주당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정의당 정부는 케말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견제 장치들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거나 정책을 펼치는데 에로 사항을 겪었다.
1970년 즈음, 튀르키예의 혼란은 커졌다.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면서 극좌와 극우의 폭력이 일상화되었고, 좌익이 주도하는 각종 시위와 파업이 이어지면서 경제 상황도 악화되었다. 정의당 내부에서도 반-데미렐 세력들이 반기를 들어 국정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주의 운동들이 힘을 얻고 있었다.
1971년, 군부는 이런 혼란한 상황을 극복한단 명목으로 데미렐 정권에 최후 통첩을 날렸다.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멘데레스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던 데미렐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총리 직에서 사임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의당 정권은 막을 내렸으며, 군부가 다시 한번 튀르키예 정치를 통제하게 되었다. 군의 입맛에 맞는 관료들이 과도 정부를 이끌었고, 헌법은 다시 국민의 자유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1973년 튀르키예는 민정으로 돌아갔지만, 군부의 개입은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정치판은 공화인민당과 정의당 말고도 극우 민족주의 성향 민족주의행동당과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의 주요 이슬람주의 정당 국민구제당이 득세하며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네지메틴 에르바칸이 이끄는 국민구제당은 멘데레스의 민주당과 데미렐의 정의당보다 훨씬 종교적인 진정한 이슬람주의 정당이었다. 민주당-정의당 계보 정당들과 함께 성장해온 이슬람 교단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 위해 노골적인 이슬람주의자 에르바칸과 동맹을 맺었다.
이 4대 정당들은 서로를 배신하면서 암투를 벌였고, 그 결과 6년간 4번이나 정부가 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다. 극좌와 극우의 갈등은 점점 난폭해졌다. 동남부에서는 그동안 탄압당한 소수민족 쿠르드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극좌 테러단체 PKK가 결성되어 게릴라 봉기가 일어났다. 튀르키예 경제는 저성장과 고물가에 시달리며 무너져가고 있었다.
국가가 준 붕괴 사태에 놓이자, 1980년 9월 12일 케난 에브렌 장군이 이끈 세번째 쿠데타가 발생했다. 에브렌은 기존 정당들을 전부 해산시키고 소속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극렬한 반대세력 탄압 정책을 펼치면서 피를 대가로 어느 정도 안정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케난 에브렌과 군부는 기존의 종교 탄압 일관책에서 선회했다. 소련이 또다른 이슬람 국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튀르키예 내부의 공산주의와 극좌 분리주의 세력도 준동하기 시작하자, 이슬람이 아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군부 세력의 새로운 주적으로 자리매김했다.
군부와 케말주의 엘리트는 극좌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 이이제이 전략을 채택해 역시나 이들과 이념적으로 대적하는 이슬람을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학교에서 이슬람에 대한 공부가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고, 이슬람주의자들의 학문/직업의 자유도 확대되었다.
이런 기조 변화에 힘입어 마침내 열린 1983년 총선에서 민주당-정의당의 후신격 모국당이 크게 승리했다. 모국당 정부는 에브렌과 군부의 묵인 하에 이슬람의 사회적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개입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시장을 개방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감행했다.
비록 물가는 쉽게 잡히지 않았으나, 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활기를 되찾았다. 이 개혁개방의 시기를 잘 잡은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업가들로 변신했다. 그러나 모국당은 말년에 자본시장을 지나치게 빨리 개방하며 혼란을 초래했고, 1990년대 튀르키예는 다시 한번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시대를 맞는다.
1987년 9월 튀르키예에서는 에브렌의 쿠데타 직전 활동하던 정치인들을 복권시키는 국민투표가 통과되었고, 70년대의 정치 거물들이 복귀하면서 튀르키예 정치는 더욱 경쟁적으로 변했다. 70년대 정치인들의 귀환은 70년대의 귀환과도 같았는데, 각자의 정당을 창당한 이들은 서로 비등비등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연립정부를 결성하다 합의를 깨기를 반복하면서 똑같은 정치 혼란을 유발했다. 정치적 불안정성과 모국당의 섣부른 자본시장 개방으로 튀르키예의 경제는 매년 평균 70%의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시달렸다.
이때 다시 한번 발흥한 것이 에르바칸의 정당이었다. 새로운 정당 복지당을 창설한 그는 당 이름에 걸맞게 복지를 통해서 지지를 확보했다. 경제 위기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필수 서비스와 각종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나, 기성 세속주의 정당들은 이들을 외면했다. 그러나 복지당은 신흥 이슬람 기업가들과 이슬람 교단들의 지원을 받아 이들에게 맞춤형 복지를 제공했다. 복지당의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풀뿌리 조직을 형성했다.
1994년 지방선거에서 복지당은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비롯한 6대 도시에서 전부 승리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특히 이때 당선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라는 이름의 이스탄불 시장은 도시 전역에 신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재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시민들의 민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등 유능한 모습을 보여줘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996년, 다른 정당들이 서로 감정의 골이 심해지자 마침내 복지당에게도 집권의 기회가 찾아왔다. 데미렐 전 총리가 새로 만든 정당 정도당이 에르바칸에게 총리직을 양보하겠다며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에르바칸 정부는 계속해서 위험한 행보를 보이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공무원 수당과 연금을 대책 없이 대폭 인상했고, 세계 각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전당대회에 초대했으며, 외교적으로 이란과 가까워졌고, 내부에서도 이슬람주의를 강압적으로 덧씌우려고 했다.
이런 에르바칸의 행보를 본 군부는 다시 한번 개입했다. 1997년 2월 28일 군부는 세속주의가 위험에 처했다며 복지당 정부에게 특정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라고 협박했고, 수차례 브리핑을 열면서 이슬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케말주의 검찰은 5월에 복지당의 해산을 청구했고, 군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서 계속 압박을 가했다. 에르바칸은 결국 6월 30일 사임했고, 훗날 이 사건은 포스트-모던 쿠데타라고 불리게 된다.
그 후 복지당은 해산되었고, 에르바칸은 5년간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에르도안 시장 역시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시 한 편을 낭송한 죄로 트집 잡혀 시장직을 박탈당했고, 이후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4개월간 복역하다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황당한 정치 탄압은 오히려 에르도안의 인기를 더욱 올려주게 되었다. 복지당의 잔당들은 에르바칸의 지휘 하에 미덕당을 창당했지만, 이 역시 소속 국회의원이 한번 히잡을 썼다고 트집 잡혀 강제로 해산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복지당-미덕당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에르바칸을 비롯한 원칙주의자들은 계속해서 강경 이슬람주의를 고집한 반면, 에르도안 같은 개혁파들은 세속주의 같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기존 가치와 직접 충돌하지 않는 온건 이슬람주의, 온건보수 정당을 주장했다. 에르바칸의 지지자들은 복지당과 미덕당을 그대로 승계한 행복당을 창당했고, 에르도안을 비롯한 개혁파는 뛰쳐나가 새로운 정당 정의개발당을 창설했다.
정의개발당은 확실히 그동안 에르바칸이 주도하던 이슬람주의 정당들과는 결이 달랐고, 그보다는 멘데레스-데미렐의 온건보수 정당에 가까웠다. 정의개발당은 스스로를 독일 기독교민주당에 비유하면서 서구와 세속주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경제 공약을 강조했다.
당시 튀르키예는 여전히 기성 세속주의 정당들이 서로 싸우면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피해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14개월마다 무너지는 정부와 고물가에 지친 유권자들은 신생 정당 정의개발당에 눈이 갔다. 정의개발당은 총선에서 34%를 득표하고 의석은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 반면, 에르바칸의 행복당은 겨우 2.5%를 득표하며 철저하게 몰락해 정치적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알렸다.
이제 원내에서 정의개발당의 유일한 맞수는 오직 공화인민당 뿐이었다. 과거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원내 진입을 막기 위해 설정한 10%의 봉쇄조항이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와 다른 기성 정당들의 원내 진출을 막은 것이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정의개발당은 국정 운영에 집중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한편 반부패 운동과 국방비 감축을 통해 마련한 예산으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와 복지 확대 정책을 펼치는, 흡사 당대 유행하던 제3의 길과 유사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튀르키예 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 호황이 찾아왔다.
2003년부터 2013년 사이 튀르키예 경제는 평균적으로 매년 6%씩 성장했고, 지난 20년간 평균 70%씩 상승하던 물가는 한자릿수로 떨어졌다. 기업의 투자는 대폭 증가했고 노동시간은 단축되었으며 영아사망률은 절반으로 감소했고 빈곤율은 42%에서 13%까지 하락했다. 수많은 달동네들이 재개발 되었고 저소득층의 의료와 주거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에르도안 집권 이전 80개도 안되던 대학은 현재 200개가 넘어간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에르도안 정권은 튀르키예 역사상 가장 소수민족에 친화적인 플랫폼을 마련했다. 쿠르드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언어로 공부할 수 있었고, 공영방송에서 최초로 쿠르드어가 방송되었다. 쿠르드 테러단체 PKK와도 휴전 협상 역시 추진되었다. 소수종파 알레비파의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고, 1차세계대전 당시 청년튀르크당이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면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도 기존보다 훨씬 진보된 입장을 내놓았다.
이러한 역사적 경제성장과 인권 강화는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탄탄한 유권자 기반을 만들었다. 고정 지지층을 확보한 에르도안은 마침내 그동안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향후 자신의 권력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군부를 수술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타튀르크 이후 그 누구도 온전히 성공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에르도안 정부는 군부 개혁을 할 명분으로 평생 서구를 동경하던 아타튀르크의 의지를 잇기 위해 유럽연합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튀르키예의 오랜 목표인 EU 가입에는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이는 군부와 케말주의자들이 민주화를 위한 군부 개혁을 반대 못할 명분이 되었다.
또한 에르도안은 자신과 힘을 합쳐 군부에 대항할 정치 운동을 찾아냈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펫훌라흐 귈렌이라는 이슬람 성직자이자 정치인이 이끄는 귈렌 운동을 포섭한 것이다. 역시나 이슬람주의 성향이던 귈렌 운동은 교육을 이용해 인재를 양성하고 사상을 전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흡사 대한민국의 시대인재를 방불케하는 귈렌 운동의 입시 학원들과 교육 기관들은 그 명성을 떨쳐 여러 학생들을 끌여들었고, 이들은 귈렌 운동의 끈끈한 풀뿌리 조직을 형성했다. 수백만명의 튀르키예인들이 따르던 귈렌 운동은 그 숫자도 숫자일 뿐만 아니라 법조계와 교육계, 기업가와 언론인, 경찰과 군인 같은 주요 직업들 사이에서도 세력이 강해 큰 도움이 되었다.
에르도안 정부는 압도적 의석을 바탕으로 군부의 각종 특권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국방비는 축소되어 대신 교육과 건설 분야에 투자되었고, 국방 예산 활용에 대한 투명성 및 의회와 회계감사원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군부의 비선실세 기구나 다름없던 국가안전보장회의에는 민관 인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그 권력도 약화되었다. 군부가 지지하던 군사법원의 권한 확대는 좌절되었으며, 오히려 민간법원이 사안에 따라 장교들을 재판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교육위원회나 방송통신위원회 내부에 존재하던 군인들의 자리는 사라졌다.
차근차근 군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던 에르도안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위기에 봉착한다. 튀르키예 대통령은 7년에 한번씩 의회에서 간선제로 뽑히는 구조였는데, 정의개발당 후보를 두고 케말주의자 야당 공화인민당과 군부가 걸고 넘어진 것이었다. 공화인민당은 해당 후보의 아내가 공개적으로 히잡을 쓴다는 사실이 세속주의를 위협한다면서 투표에 불참해 대선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의회를 마비시켰고, 군부는 아예 쿠데타를 협박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이런 상황에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군부가 대통령 선출에 관여하는게 말이 되냐고 받아치면서 강대강으로 나왔다. 대선 사보타주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또다시 대승을 거두며 민심의 지지를 재확인했고, 다른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데 성공하며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에르도안은 다음 대통령부터는 민심으로 뽑도록 개헌하는 국민투표를 밀어붙였고, 이는 69%의 지지율을 얻으며 통과되었다.
에르도안의 반격과 지지세에 당황한 군부와 케말주의자들은 이번에 그를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친-군부 검사들은 여당 정의개발당이 ‘반-세속주의의 중심지’라면서 정의개발당의 정당 해산과 대통령 및 에르도안을 포함한 주요 정의개발당 정치인들의 활동권 5년 박탈을 청구했다. 튀르키예 헌법재판소 역시 케말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정의개발당은 재판관 1명의 차이로 가까스로 해산과 활동권 박탈을 면했다. 지옥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에르도안은 군부를 확실히 거세하기 위해 움직였다.
2008년 초, 에르게네콘 스캔들이 터졌다. 이전부터 좌익과 리버럴들을 중심으로 튀르키예 내부에는 군대와 관료, 경찰과 언론, 범죄조직과 극우단체를 아우르는 극우 민족주의 비밀결사 ‘에르게네콘’이 존재해 튀르키예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음모론이 돌았다. 에르도안 정부는 이것이 실존한다는 제보를 받았고, 귈렌 운동에 속하는 검사들이 이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장성들과 군 인사들이 체포되며 감옥에 갇혔다.
또다른 음모도 발각되었다. 2003년 초 일부 장성들이 그리스와 군사분쟁을 일으킨 다음 그걸 구실 삼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슬레지해머 계획’이었다. 이 사건으로 역시나 수백명의 군 인사들이 구금되거나 투옥되었고, 2012년 대다수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에르게네콘과 슬레지해머 사건의 후폭풍으로 군부 내에서 대규모 인사 개편이 이뤄졌다.
훗날 드러나지만, 에르게네콘과 슬레지해머의 관련자들 절대다수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에르게네콘은 그 실체가 미미한 단체였고, 슬레지해머 계획의 핵심 문건이라고 알려진 것도 실은 가짜였다. 이 두 사건에 대한 기소와 재판은 대부분 불충분하거나 조작된 증거로 이뤄진 것이었고, 때문에 재판 도중에도 그 정당성과 관련된 논란이 컸다.
그러나 대다수 튀르키예 국민들은 이미 재판 절차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이를 묵인했다. 에르도안의 지지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세속주의자들과 좌파들 역시 대부분 눈을 감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군부는 세속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강압적인 독재와 함께 사회 곳곳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정작 그러면서 경제 발전조차 이룩하지 못한 세력이기 때문에 이이제이 논리로 군부 청산을 지지한 것이다.
이렇게 에르도안은 군부 내부를 한 차례 물갈이하는데 성공했고, 그 자리는 주로 귈렌주의 군인들이 대체했다. 그러나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는 법, 귈렌 운동은 곧 에르도안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양측은 이데올로기적 차이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귈렌 운동의 욕심이었다.
끈끈한 네트워크를 가진 귈렌주의자들은 각종 공무원 시험의 문제를 빼돌려 동료들에게 제공해 부정행위로 공공기관에 침투했다. 정부부처와 지방의회에 잠입한 이들은 같은 귈렌 운동 소속 기업들에게 일감을 몰아줬고, 가면 갈수록 대담해져 아예 에르도안에게 의회 의석 100석을 자신들에게 할당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다가 귈렌 운동이 에르도안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충격에 빠진 에르도안은 귈렌을 손절하기로 결심했다. 정부는 사교육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귈렌의 입시학원을 대부분 폐쇄했다. 귈렌주의자들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에르도안 정부의 부패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폭로해 장관 4명을 사임하게 만들었다. 에르도안 본인 역시 둘째 아들에게 외화를 잘 관리하라고 지시한 녹취록이 터지며 곤란에 빠졌다.
위기에 놓인 에르도안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그는 녹취록이 조작되었고 귈렌과 그의 테러 조직이 국가를 내부에서 장악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규모 인사개편을 통해 귈렌주의자들을 한직으로 몰아냈다. 이런 공개적인 충돌에도 불구하고 정의개발당은 지방선거와 에르도안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 두 번의 총선에서 또다시 압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에르도안은 대통령이 된 후 기존의 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을 하며 권력 공고화에 성공했다. 귈렌 운동은 테러리스트 낙인이 찍히며 동력을 잃었다.
그러다가 2016년 7월 15일,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그날 밤 두 대의 전투기가 무단으로 이륙해 앙카라로 향했고, 동시에 30명의 군인들이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대교를 봉쇄했다. 국가정보부가 습격 받았고, 참모총장을 비롯한 여러 군 고위 인사들이 납치당했으며, 제트기가 의회와 대통령궁을 폭격했고, 헬리콥터가 경찰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공영방송에 병사들이 출연해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쿠데타를 알렸다.
이 사건의 주도자들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튀르키예 정부의 공식 입장이자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통설은 이 사건이 궁지에 몰린 귈렌주의자들의 반격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귈렌주의자들은 쿠데타가 에르도안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그 밖에도 기성 군부 세력이 일으킨 일을 에르도안이 귈렌 운동에 덮어씌웠다거나, 에르도안이 귈렌주의자들의 쿠데타를 일부러 유도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물론 큰 의미가 없는 논의다. 쿠데타가 6시간 만에 진압됐기 때문이다. 쿠데타 세력은 정부가 눈치를 챘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급히 움직여 결과적으로 당초 계획보다 더 적은 병력을 동원했다. 휘하 병력 역시 적잖은 수가 징집된 일반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결정적으로 여당 지도부, 특히 당시 휴가를 가 있던 에르도안 대통령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계획의 실패보다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1980년에 머물러있던 쿠데타 교본은 2016년에 어울리지 않았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휴대전화를 가진 모든 국민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달라고 호소하는 문자를 보냈다. 그는 CNN과 페이스타임으로 통화하며 다시 한번 쿠데타 세력에게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이스탄불 전역에서 대형 모스크들이 실시간으로 동원령을 선포하는 경고음을 울리며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분노한 국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쿠데타군을 틀어막았다. 100년 전의 압뒬하미트도 쿠데타에서 지키지 못했고 50년 전의 멘데레스도 쿠데타에서 지키지 못했지만 오늘의 에르도안만큼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말이다. 쿠데타군은 이스탄불과 앙카라 길거리를 가득 채운 민중의 파도에 그대로 파묻혀버렸다.
사태가 발발한지 약 6시간 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 자신이 건재함을 온 세상에 알렸다. 고무된 시민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 틈을 타 정부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내란 세력을 진압했다. 20세기의 쿠데타는 21세기의 기술력과 민중에 의해 그렇게 무너졌다. 처음으로 군부가 패배하고 국민이 승리한 순간이었다.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튀르키예군에는 피의 숙청이 일어났다. 몇 년에 걸친 가혹한 숙청으로 장성과 제독의 40%, 장교진의 30%가 해임되었는데, 특히 참모장교는 무려 80%가 숙청되었다. 쿠데타에 크게 연루된 공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 사태로 유능한 조종사들을 다수 잃어 한동안 최신 전투기들을 운행 못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구조적인 개혁도 완수되었다. 육해공군의 통제권은 군에서 국방부로 완전히 이관되었다. 군이 운영하던 군사병원의 통제권도 보건부로 이송되었고, 군사고등학교는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각 군의 사관학교 역시 교육부가 감시하는 신설 군사대학 아래로 통합되었다. 국내 안보에 대한 군의 권한은 경찰에게, 첩보에 대한 권한은 정보부에게 분산되었다. 헌병대와 해안경비대에 대한 통제권 역시 군에서 내무부로 옮겨갔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군부 내부의 위험 세력을 제거하고 국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여러 당근도 제공했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도안 정부는 기존의 평화주의 외교 노선을 뒤집고 튀르키예군을 시리아 내전에 투입시켰다. 튀르키예군은 이후 카타르와 리비아와 소말리아 등 중동 각지에 파병되면서 외교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테러조직 PKK와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그는 기존의 소수민족 친화 노선에서 벗어나 케말주의 세력의 민족주의를 수용했다. 에르도안은 자신의 종교보수주의, 범이슬람주의 색채를 완화하고 그 대신 민족주의적 구호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 변신해 일부 보수적인 케말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정의개발당 정권은 튀르키예군의 오랜 염원이던 국산화를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 튀르키예의 방위산업은 지난 몇 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왔고,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의 사위가 진출해 있는 드론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이런 자국 방위산업의 성장은 튀르키예군의 대대적인 첨단화와 현대화도 견인하고 있다.
결국 에르도안 정권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거세하면서도, 군의 대외적 역할과 위상, 역량은 오히려 끌어올리면서 군대를 완전히 길들이는데 성공했다. 오늘날 튀르키예군은 (쿠르드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의 자랑거리고, 대내적으로 조용한 대신 대외 정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마침내 한 국가, 국민의 군대로써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니체의 명언처럼, 괴물과 싸우는 자는 쉽게 괴물이 되어버린다. 수십년간 나라를 지배하던 군부 권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한 에르도안은 오늘날 그 자신 강압적인 역시 권위주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친-정부 기업들은 여러 이권을 제공받고 배를 불리면서 그 대가로 정부를 지지해 위험하고 부패한 정경유착 관계를 형성했다.
반정부 언론인과 정치인, 관료들은 외세의 앞잡이나 반국가세력으로 몰리면서 탄압받고,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같은 SNS는 종종 검열되거나 일시적으로 차단당한다. 얼마 전에는 유력 야권 후보가 각종 범죄 혐의로 구속되고 동시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선 후보직도 박탈당하자 야당 지지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 정부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동안 상승하던 튀르키예의 민주주의 지수는 2013년 경 정점을 찍은 후 서서히 하락하고 있고, 그 때문에 유럽연합 가입 협상 역시 2016년 사실상 중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에르도안의 주요 치적인 경제 역시 2018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미국과의 갈등, 역내 정세 불안정 등의 요인들은 외환위기를 불러왔고, 코로나 팬데믹과 에르도안 본인의 과한 저금리 정책 때문에 튀르키예 국민들은 최근 몇년간 1990년대와 비슷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는 2023년부터 물가 안정을 위해 고금리 정책으로 선회했지만, 인플레이션 위기가 해소되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의 지지율은 집권 후 사상 최저 수준이다.
시니컬하게 보자면, 결국 기존의 군부가 주도하던 억압적인 사회는 이제 단순히 에르도안이 주도하는 억압적 사회로 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튀르키예의 경제성장과 자유화를 이끌던 정의개발당은 결국 장기집권을 하면서 그들이 싸우던 세력과 비슷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국민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지갑도 고통받게 만드는 정권 말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군부가 조용하다는 것이다. 에르도안의 개혁으로 문민통제가 완벽히 이뤄지면서 군부의 잔재들은 사라졌고, 군대는 비정치적인 기관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은 투표와 개표의 공정성만큼은 확실히 보장하고 있다.
튀르키예 정치는 오랫동안 군복을 입은 장교들의 쿠데타에 의해 주도되어왔다. 그러나 그들의 반복되는 개입은 갈수록 누적되어 에르도안이라는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왔고, 기나긴 대수술 끝에 오늘날 군대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기관이 되었다. 앞으로 튀르키예인들이 어떤 길을 택할지는 온전히 그들에게 달려있다.
참고자료:
<문명의 교차로 터키의 오늘> - 김희철
<오스만제국의 영광과 쇠락,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 - 조윤수
<거꾸로 가는 새로운 튀르키예> - 김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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