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정당화된 적이 없고, 오직 미화되었을 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과거의 비판은 물론 새로운 비판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반박된 적이 없다. 


그 비판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허버트 스펜서,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블라디미르 레닌, 프리드리히 니체, 조제프 드 메스트르 등등.


열거한 비판들은 민주주의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체제일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자유조차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몇몇 이들은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을 대의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순수한 폴리스형 직접 민주주의나 그에 근접한 형태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직접 민주주의라고 알려진 거의 모든 사례는 상당 부분 대의제의 요소가 섞여 있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며 대의제에 의해 대체 당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직접 민주주의는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추상적 이상, 쉽게 말해서 환상에 불과하다.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한걸로 오해받는 장 자크 루소조차 "아무리 작은 국가라 할지라도, 모든 구성원이 직접 통치하기에는 시민 사회의 인구가 항상 너무 많다"고 말했다.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들은 직접 민주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든 거부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했듯이 민주주의는 올바른 결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다수가 소수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저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정당, 가족, 기업, 노조 등 거의 모든 자발적 결사체는 통치 형태로써 과두정을 택한다. 실제로 직접이든 대의든, 의회와 유권자 집단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못하며, 오히려 그 이하다. 다수결이 비효율적이고 사회적 낭비를 낳으며 자기 파괴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수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다. 결정 자체는 결정 과정과 무관할 수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소수는 다수에 순응하는 동안 무력하다. 그 순간 소수는 소수조차 아니다"라고 썼다. 소수는 말 그대로 무력하며, 아무것도 아니다. 


토머스 홉스는 한발 앞서 이렇게 말했다. "대표가 다수로 구성될 때, 다수의 목소리가 곧 전체의 목소리가 된다. 소수가 찬성하고 다수가 반대하면, 그 반대표는 찬성표를 삼키고도 남는다. 결국 소수의 의견은 소멸되고, 오직 다수의 의견만이 유일한 목소리로 남게 된다."


존 C. 칼훈 역시 "수적 다수란, 반대 의견을 묵살해버린다는 점에서 소수가 지배하는 독재정과 다를 바 없는 절대 권력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절차적인 문제도 있다.


다수결인가, 최다 득표인가? 대리 투표는? 의사정족수는? 특정 안건에 가중 다수결(3/5, 2/3)이 필요한가? 의제는 누가 설정하는가? 현장 발의는 허용되는가? 발언자와 발언 시간, 첫 발언과 마지막 발언은 누가 정하는가? 회의 일정과 폐회는 누가 결정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누가, 어떤 규칙으로 정하는가? 


투표 규칙 자체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 그 규칙에 대해 먼저 투표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투표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릴 수 있고, 결국 결정은 영원히 뒤로 미뤄져 본안에 대한 투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콩도르세가 발견한 '투표의 역설'이라는 기술적이지만 매우 현실적인 모순이 있는데, 골자는 두 명 이상의 유권자가 세 개 이상의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때, 유권자들이 일관된 선호를 갖더라도, 투표 순서에 따라 다수의 선호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A가 B보다 선호되고, B가 C보다 선호되는데, 정작 C가 A보다 선호되는 황당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다수결은 거의 항상 이런 순환적인 선호의 순서를 낳는다. 이러한 이유로 다수결의 여러 균형 조건은 아주 약간의 취향 차이와도 양립 불가능하며, 사실상 만장일치라는 극단적 조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