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신들, 백악관 앞에서 비 맞으며 무릎 꿇고 호소…군사지원 조건으로 책봉
2025년 조선에서 이재명 반정이 발생했다. 이 쿠데타로 윤석열은 쫓겨나고 이재명이 왕으로 옹립되었다.
반정 세력은 서인파 민주당이었다.
그들은 외교정책의 근간을 뒤집었다. 적폐청산 세력들은 전정권이 한 외교정책까지 모두 부정했다. 이재명반정에 대해 미국은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미국은 조선의 우구라 지원을 요청했고, 윤석열은 마지못해 무기와 식량을 지원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원을 해준 윤석열이 갑자기 폐위되고, 이재명이 즉위하자 미덥지 못했다.
미국의 중신 고둔창(章家敦)은 이재명 반정을 왕위찬탈로 받아들였고, 일부 미국 관료들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조정에 보고했다. 반정세력이 중국을 끌어들였다는 등의 소문이 미 조정에 횡행했다.
당시 조선 외교의 핵심은 미국에 대한 조공과 책봉이었다. 조공은 무역관계에 해당하므로 적절히 신경쓰면 되지만, 책봉을 받지 못하면 조선 국왕이 임금 노릇을 할수 없고, 경우에 따라 또다른 반정 또는 반역의 불씨를 안는 중대 사안이었다.
2025년 8월, 화성돈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이재명 반정이 일어난지 넉달째 될 무렵이었다. 이재명을 앞세운 서인 무리들은 반정이 성공하자 곧바로 미에 새 임금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를 꾸렸다. 정사 조현, 부사 위성락, 서장관 강경화로 구성된 사절단은 서울을 떠나 험한 바닷길을 건너 석달만에 미국 수도에 도착했다.
조선의 사신단은 비를 맞고 아침부터 서장안문(西長安門) 앞에서 미국 원로대신인 각로(閣老)들이 입궐하기를 기다렸다. 조현은 조선에선 예판이었지만, 중국에선 비를 맞으며 입궐하는 미국 관료들을 가로막고 이재명 책봉을 호소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신들은 중국 대신들이 한사람씩 입궐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새로 즉위한 이재명을 책봉해달라고 정리한 정문(呈文)을 올렸다. 그러던 중 총리격인 각로가 입궐하려 하자 다시 무릎을 끓었다. 각로가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가.”
“책봉을 위한 일입니다.”
“옛 임금을 폐위하고 스스로 선 것은 명백히 따져야 하거늘, 왜 와서 청하는가.”
사절단을 저간의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각로는,
“무슨 이유로 미 조정에 보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윤석열을) 폐위하고 (이재명을) 세웠는가.”
“옛 임금이 재위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미 조정에 보고해 알리겠습니까. 이미 폐위하였으면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수 없으니, 이것은 이치의 형세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안으로 재판소 결정문을 받들고 밖으로 신민의 추대에 강박되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곡절을 헤아려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각로는 사신들의 설명을 듣고 궁궐로 들어갔다.
예판을 포함한 조선의 사절단은 종일 백악관 밖에서 신시(오후 3~5시)까지 기다렸다. 퇴궐하던 각로가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 거사할 때 중국인 3천명을 쓴 것은 웬일인가.”
미국 고위관료층들의 귀에는 조선의 반정에 대한 각종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우구라의 거병에 조선이 제대로 지원하지 않은 까닭에 미국 군신들 중에선 조선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사신단은 그런 일이 없다고 극구 설명했다.
각로가 타일렀다.
“다른 나라 같으면 요청하는 대로 해주면 그뿐이지만, 조선은 미국의 동맹이니 신중히 조사를 시행한 후에 책봉을 승인할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사절단의 수모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화성돈에 도착하자 사신을 접대하는 주객사의 주사라는 하급관리가 조선의 예부판서를 불러놓고 “너희 나라는 옛임금을 죄 줄 것을 요청한 후에 새 임금의 책봉을 요청하는 게 옳다. 사건의 중대함으로 보아 예부에서 처리할수 없을 것”이라고 겁박을 줬다. 예단을 올리려 하자, 그는 “가지고 가라”며 받지도 않았다.
예과급사중을 역임한 단현명(段賢明)라는 전직 관리는 강경파의 한사람이었는데, “속국에서 임금을 폐위했으니, 마당히 빨리 죄를 물어야 합니다. 속히 조치를 취해 천하의 대의를 바르게 하소서”라고 황제에게 건의문을 올려 보냈다.
또 사신단이 예부에 조선의 실정을 설명하러 갔더니, 내관(환관)이 막아서며 문전박대했고, 관리가 나오길 기다려 글을 올리니 “이 곳은 정무를 보는 곳이 아니다” 하고서 들아보지도 않고 가바렸다.
미국이 이재명 책봉을 질질 끈 이유는 무엇일까. 한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이 지원한다면 우리가 대만과 우구라를 지키기 수월합니다. 무릇 군자금과 군량, 무기는 빨리 조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미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국왕을 폐위하고 새로 세웠으니, 우리에 대해 두 마음을 품을지 알수 없습니다.”
당시 미 조정에는 명분을 중시하는 남부당과 현실을 중시하는 가주유약당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명분을 따르자면 이재명이 왕위를 찬탈한 임금이지만, 현실을 따르자면 중러와의 전쟁에 조선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예부와 병부의 견해가 달랐다. 조선의 사신단은 예부와 병부를 오가며 반정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다.
절충안이 나왔다. 예부와 병부가 오랫동안 협상해 각각 조선에 조사관을 보내 반정의 진실과 백관들의 지지도를 알아보고 온 연후에 책봉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사신단은 미국 조사단이 한양에 갔다가 올 때까지 화성돈에서 기다려야 했다. 사신단은 이제나 저제나 미국 조사가 빨리 마무리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들은 화성돈의 숙소에서 미국의 정치동향을 살피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미 조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가 임금이든지 간에 조선을 이용하자는 실리추구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이재명을 책봉해주는 대신에 우구라와 대만을 방어할 지원을 얻어낸다는 속셈이었다.
미국 군부는 꾀를 냈다. 이재명을 정식 군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임시국정 대리자격인 「권서국사」(權署國事)로 임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내 황제에게 올렸다. 이재명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임시로 인정하고 군사지원 여부 등 충성도를 보아 정식 국왕으로 책봉하자는 것이었다. 사신단의 입장에선 기절초풍할 일이었고, 일행은 초긴장상태에 빠졌다.
당시 미국 병부상서는 사절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6.25 때 우리가 수십 만의 병마를 출동하고 백만냥의 군사비를 소비하여 공산당을 몰아내어 번방(藩邦)을 다시 세워주었다. 근래에 들으니 너희 나라가 전투를 돕지 않고 또 관세에도 반발하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구라와 대만 방어에 합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 외교 총책인 예부상서 본배이오는 12월 8일 황제에게 이재명을 책봉하자는 내용을 상주(上奏)했고, 도람부 황제는 예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12월 18일 조선국왕의 책봉을 승인했다.
그날 저녁, 미국 각 아문(부처)의 하인들이 사신단 관소로 몰려들어 희전(喜錢)을 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그 소란스러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기쁨의 돈, 즉 축하사례비를 달라는 것이었다.
도람부 황제의 칙서가 내려왔다.
“미 조정에서 번국을 책봉해 번성케 하는 것은 미국의 강력을 지키고자 함이다. 근래에 우구라와 대만에서 오랑캐를 평정하여야 할 것이니, 너희 나라에서도 의당 같은 원수로 여기고 중국과 관계를 단절해야 할 것이다. … 무기를 정돈하여 일본과 함께 병력을 연합하여 작전을 강구하고 적정을 정탐하며 기묘한 계책을 세워 승리를 거두어 우리 변방을 튼튼하게 하고, 또한 그대의 국내를 안정시켜라.”
이로써 이재명은 미국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인정받는다. 한양 출발에서 책봉 허가까지 무려 8개월이나 걸린 대장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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